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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95
한자 熊津祠址
영어의미역 Ungjinsa Shrine Sit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452-3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강종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당 터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백제시대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452-3 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에 있는 백제시대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신제를 올렸던 사당의 터.

[개설]

웅진사가 있는 고마나루에는 처녀곰과 나그네, 또는 나무꾼 총각에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현재 고마나루 북쪽에 솟은 연미산 중턱에 전설 속 곰이 살았다는 곰굴이 고마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곰의 원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나루터 인근에 웅진사를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변천]

백제시대에는 곰나루에서 제의가 행해졌는데, 백제 멸망 이후 통일신라 때에는 서독(西瀆),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웅진연소(熊津衍所), 이후 웅진사(熊津祠)로 변천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때의 국가 제사는 전국의 명산과 대천을 대사, 중사, 소사로 구분하여 이루어졌는데, 이 가운데 중사는 5악, 4진, 4독으로 구성되었으며, 웅천하(熊川河)는 4독 가운데 서독으로 중사(中祀)에 편성되어 있었다. 이는 백제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의 경우 사전(祀典)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조선시대의 방식과 내용적으로 비슷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경우, 1414년(태종 14)에 제정된 산천 제사 제도에 의하면 중사(中祀) 13처 가운데 웅진이 포함되어 있는데, 웅진단에서의 제사는 국가적 사전(祀典)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악(嶽), 해(海), 독(瀆) 및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는 중춘(仲春)과 중추(仲秋) 상순에 연 2회 정기적으로 거행되었다고 한다.

[현황]

곰나루 숲의 강변 쪽에 웅진사 터로 알려진 곳이 남아 있지만 흔적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한국지명총람』의 내용에 의하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다가 해방 이후에 폐지되었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가 1965년에 묘로 쓰면서 흔적이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한동안 지역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현재 계룡산신제 행사 기간 중 이곳에서 수신제를 지내고 있으며, 행사를 위해 간단하게 단을 조성해 놓았다.

[의의와 평가]

백제시대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국가의 제사 공간이었으며, 근대에 와서는 지역 주민들의 제사 공간으로서, 서민의 정서와 애환이 짙게 서려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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