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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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怡 |
영어공식명칭 | Kim Jeongmi |
이칭/별칭 | 김지정(金之琔),김정미(金廷美),열심(悅心),은지(隱之),산남(山南),광정공(匡定公),경산군(慶山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고려 후기 경산군에 봉해진 문신.
[개설]
김이(金怡)[1265~1327]는 원나라 간섭기 때 활동한 문신이자, 춘양 김씨(春陽金氏) 가문의 시조이다.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간의 갈등과 입성 책동(立省策動)을 막아내는데 공을 세웠다. 1320년(충숙왕 7)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졌다.
[가계]
김이의 본관은 춘양(春陽), 자는 열심(悅心)·은지(隱之), 호는 산남(山南)이다. 초명은 김지정(金之琔)으로 김정미(金廷美)로 개명하였다. 충선왕이 ‘김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김문귀(金文貴)가 아들이다.
[활동 사항]
김이는 1265년(원종 6) 출생하였다. 10대에 서리(胥吏)에 임명되었고, 1288년(충렬왕 14) 장흥부 수령으로 부임하였다. 1290년(충렬왕 16) 합단(哈丹)이 쳐들어오자, 장흥부 백성들을 잘 단속하여 굶주리지 않게 하고 이웃 고을에도 도움을 주었다. 1292년(충렬왕 18) 내시(內侍)로 임명되어 조정에 들어갔으며, 즉위 8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에 체류하던 충선왕을 시종하였다. 1304년(충렬왕 30) 류청신(柳淸臣)·박경량(朴景亮) 등의 부원(附元) 세력이 입성 책동[원나라로 하여금 고려에 행성(行省)의 설치를 꾀한 사건]을 일으키자, 충선왕을 설득하여 이를 막아 내었다. 또한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에 대한 부원 세력의 이간질을 저지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승진하여 판도 정랑(版圖正郞)에 올랐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자 고려로 돌아왔다. 충선왕은 김이를 민부의랑 시내부령 겸 선공부령 도진장(民部議郞試內府令兼繕工副令都津長)에 임명하고, 개성소윤 겸 풍저창 광흥창 의영고 제용사사(開城少尹豊儲倉廣興倉義盈庫濟用司事)를 맡겨, 나라의 전곡(錢穀)에 대한 출납을 위임하였다. 1309년(충선왕 1) 사헌집의(司憲執義)·우부승지(右副承旨), 1310년(충선왕 2) 밀직부사에 올랐다. 1313년(충선왕 5) 원나라에 체류하던 충선왕이 자신의 뜻을 거역했다며 김심(金深) 등을 유폐시켰을 때 김이도 김심과 한패로 의심받아 기장 감무(機張監務)로 좌천되었다. 이때 아들 김문귀도 합포(合浦)에 유배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당하였다.
충숙왕이 즉위한 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었다. 1320년(충숙왕 7)에는 경산군에 봉해졌다. 1321년(충숙왕 8) 충선왕을 믿고 권세를 부리던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일파가 유배되었는데, 김이도 연루되어 순군(巡軍)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에 앞서 1320년 고려 출신의 원나라 환관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공격으로 충선왕이 토번(吐番)[티베트]으로 유배를 가고, 1321년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자, 류청신·오잠(吳潛) 등이 입성 책동을 재개하였다. 이에 김이는 최성지(崔誠之)·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입성 책동을 막아 내었다. 이후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고, 1326년(충숙왕 13) 첨의정승(僉議政丞), 1327년(충숙왕 14)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올랐다.
[상훈과 추모]
김이는 1313년 수성보절공신(輸誠保節功臣)에 녹훈되었으며, 1327년 입성 책동을 저지한 공으로 추충보절동덕공신(推忠保節同德功臣)이 되었다. 1327년 김이가 사망하자 나라에서 광정(匡定)이라는 시호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