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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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上新垈-堂山祭 |
영어의미역 | Village Tutelary Festival in Sangsindae Village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신대리 상신대마을 |
집필자 | 김성채 |
의례 장소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신대리 상신대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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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마을 신앙|당산제 |
의례 시기/일시 | 음력 4월 8일 |
신당/신체 | 고속정 느티나무|방계 팽나무|농바구 소나무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신대리 상신대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던 마을 제사.
[개설]
상신대마을 당산제는 음력 사월 초파일에 신대리 상신대마을에 있는 ‘고속정 느티나무’, ‘방계 팽나무’, ‘농바구 소나무’ 등의 당산에서 마을 공동으로 지내던 제사이다. 지금은 ‘구제산계 회취’에 흡수된 마을 제의이다. 상신대마을은 소설 『토지』의 무대로 잘 알려진 악양면 평사리와 마주 보고 있으며, 형제봉과 구재봉 등이 마을을 휘감고 섬진강까지 뻗어 내려 있어 좋은 경관을 자랑한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 축지교를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잠수교 같은 작은 다리가 나오는데, 이곳을 건너 직진하면 신대리 상신대마을이 나온다.
[연원 및 변천]
상신대마을 당산제의 연원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는 제보자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합천 이씨 두 집안과 전주 이씨 한 집안 이렇게 세 집안이 400여 년 전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니, 당산제가 그 즈음 시작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이후 구제산계 회취로 통합되어 현재는 전승되지 않기 때문에 당산제에 대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제보자는 많지 않았다.
[신당/신체의 형태]
상신대마을에는 ‘고속정 느티나무’, ‘방계 팽나무’, ‘농바구 소나무’, ‘청룡들 청룡바위’ 등 네 군데의 당산이 있다. 이 중 고속정의 당산이 ‘고속정 할매’로 가장 높은 신이고, 다음은 농바구의 당산이다. ‘농바구 소나무’는 뒷산에서 내려오는 줄영으로 인식하여 섬기고 있으며, ‘방계 팽나무’와 ‘청룡들 청룡바위’는 이 두 당산을 보좌하는 좌청룡 우백호라고 여기고 있다. 청룡바위의 경우 거북이 모양으로 생겼다고 전해지나 1980년대 들어 시작된 농지 정리로 인하여 예전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나머지 세 당산은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절차]
정월 초 마을 회의를 통해 깨끗한 사람을 제관으로 추대한다. 이후 제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면 제관은 마을 내 당산을 정화하는 의례를 행한다. 모든 의례는 제관이 담당하는데 뒷산 ‘고속정 느티나무’부터 대나무를 세워 금줄을 제장 주위에 두른다. 이때 오색 종이를 준비하여 왼새끼로 꼬아 둔 금줄 사이사이에 끼워 두어 나쁜 액운의 침범을 막는다. 또한 마을 인근에서 깨끗한 황토를 가져와 제당 주변에 뿌려 둔다. 이후 제일까지 제관은 바깥출입을 삼가고 목욕재계를 하며 집안에서 정진하면서 당산제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제관은 제일에 가까운 장날에 제수를 장만하러 가는데 이때도 지켜야 할 금기가 있다. 먼저 삿갓을 쓰고 가서 다른 사람과 마주치는 일을 피한다. 또한 제수 가격은 깎지 않고 가장 좋은 품질의 제수를 준비한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 제수를 준비하는데, 제수를 준비할 때도 정성을 들여 해야 탈이 없다고 한다. 제물은 밥, 나물, 탕, 전, 떡, 포, 과일, 돼지고기, 소고기 등 기제사와 비슷했다.
제수 장만을 하고 난 후 사월 초파일이 되면 ‘고속정 느티나무’부터 제를 올린다. 제는 동이 틀 무렵 사람의 인기척이 없을 때 올린다. 제를 올리는 순서는 고속정→농바구→방계→청룡들 순이다. 의례 절차는 일반적인 기제사 절차를 따른다. 제의 순서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분향[향을 피움]→ 초헌[첫 잔 올림]→ 독축[축문 읽음]→ 아헌[둘째 잔 올림]→ 종헌[셋째 잔 올림]→ 첨작[종헌했던 잔에 다시 술을 채움] 등의 순이다. 매년 제관이 바뀌기 때문에 절차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고 하나 자신의 조상에게 드리는 기제사보다 엄숙하게 지냈다고 한다.
[축문]
축문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부대 행사]
당산제를 지내는 날은 마을 잔치나 다름없었다. 새벽에 제를 마치고 나서 아침이 되면 농악을 앞세워 마을 내 놀이판이 벌어지고 음식을 나눠 먹었으며, 오후에는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집돌량[지신밟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황]
상신대마을 당산제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전까지 전승되다가 ‘구제산계 회취’에 흡수되어 현재는 전승되지 않고 있다. 전승이 단절된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 기억하는 제보자는 만날 수 없었으나 구제산계 회취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제의이기 때문에 경제적 이유로 단절되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이후 당산제 제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공유 재산인 당산제 논 1,322.32㎡[400평]도 ‘구제산계’로 이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