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54
한자 烽燧
영어공식명칭 The Becon Signal Fir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희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금강산 봉수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해리 금강산지도보기
좌곡산[봉대산] 봉수 -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내동리 산100 봉대산지도보기
달마산 봉수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산303-2 달마산지도보기
갈두산 봉수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산지도보기
관두산 봉수 -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산79-1 관두산지도보기
황원 봉수 -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 일성산지도보기
화산 봉수 - 전라남도 해남군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통신수단인 봉수 유적.

[개설]

봉수는 봉(烽)[횃불]과 수(燧)[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 시대의 통신 제도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우역제와 더불어 신식 우편과 전기통신이 창시되기 이전의 전근대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 방법이었다. 군사 통신 제도로서 봉수는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고, 고려시대에 제도화되었으며, 조선 세종 때 전국적으로 정비되었다. 문화재청에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봉수 유적 일제 조사를 한 바에 따르면 전국 428개소가 확인되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전남 지역은 제5거(炬) 직봉(直烽) 체계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5거[순천~서울 간 직봉 61개소, 간봉 24개소]는 전라도로부터 충청도를 거쳐 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이다.

해남에는 북일면 내동리 좌곡산[봉대산] 봉수,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 봉수, 송지면 송호리 갈두산 봉수, 화산면 관동리 관두산 봉수, 해남읍 금강산 봉수, 화원면 장춘리 황원 봉수 등 6개소가 조사된 바 있다. 화산 봉수는 기록상 확인되고 있지만 위치는 미상이다.

[분포 현황]

봉수는 변방이나 해안의 급보를 중앙이나 읍치, 영진에 빨리 알리기 위한 시설이므로 교통로를 바라보기 좋은 곳에 자리한다. 해남군의 봉수 유적도 해안을 따라 조망하기 좋은 산의 정상에 분포되어 있다. 제5거의 직봉으로 좌곡산 봉수, 달마산 봉수, 관두산 봉수가 있다. 화산 봉수는 위치는 미상이지만 직봉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관두산 봉수와 대체하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이기 때문이다. 갈두산 봉수황원 봉수는 간봉(間烽)[조선 후기 봉수(烽燧)에서 5개의 직봉(直烽) 노선 사이에 연락의 단절을 우려해 각 노선마다 보조로 설치한 봉수] 성격으로 볼 수 있다. 금강산 봉수는 권설봉수(權設烽燧) 성격을 띠고 있다. 해안의 연변 봉수를 해남 본읍에 연결하는 봉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해남 지역 7개소 봉수는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에서 확인하기가 어렵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좌곡산 봉수,갈두산 봉수, 관두산 봉수, 황원 봉수 4개소는 기록이 나오고 있어 빠르면 고려시대 말부터 운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해남 지역은 고려 말 왜구 침입으로 인해 진도가 1350년에 영암 지역으로 내천하였다가 해남과 합해져 해진군이 되는 시기가 있어 실제로 운영이 되었는지에 유적이나 유물의 조사와 함께 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이들 봉수의 관할 군현이 지금과는 다르다는 점도 살펴보아야 한다. 달마산 봉수와 갈두산 봉수가 있던 지역은 조선시대 영암에 속하다가 1906년 해남에 편입되었다. 좌곡산 봉수가 있던 지역은 강진에 속하였다.

[특징과 의의]

해남 지역에서 조사 확인된 봉수 유적은 7개소이다. 좌곡산 봉수, 달마산 봉수, 관두산 봉수는 제5거의 직봉으로서 해남 지역이 연변 봉수 지역으로 그만큼 입지상 중요한 곳이었임을 알게 해 준다. 금강산 봉수는 해남 본읍에 연결하는 권설봉수 성격이 나타나고 있다. 갈두산 봉수황원 봉수는 간봉에 해당한다. 화산 봉수는 위치는 확인되지 않지만 조선시대 봉수 제도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시사점을 엿볼 수 있다. 1451년(문종 1)에 화산 봉수의 연기가 민가(民家)의 연기와 섞여 보여 혼란이 우려되어 관두산 봉수로 옮긴다는 기록이 『문종실록』에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변방 해안의 통신 수단으로서 봉수는 중앙 차원에서도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봉수의 관할 군현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해남 지역이지만, 좌곡산 봉수는 강진, 달마산 봉수와 갈두산 봉수는 영암에 속하였다. 관방시설을 통하여 해남과 해남 인근 군현관의 행정 체계도 알 수 있다는 데서 또 다른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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