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기 김성일의 의병모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47
한자 壬辰倭亂期金誠一-義兵募集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정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5월 4일 - 김성일 경상우도초유사 활동
종결 시기/일시 1592년 8월 6일 - 김성일 경상우도초유사 종결
발생|시작 장소 경상우도초유사 - 경상남도 함양군
종결 장소 경상우도초유사 - 경상남도 함양군
성격 사건·사고와 사회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성일

[정의]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남도 함양군에 온 경상우도초유사 김성일이 민심수습과 의병모집을 했던 사건.

[개설]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 임명된 김성일은 1592년 5월 4일에 함양군에 도착하여, 8월 6일에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이동할 때까지 약 3개월간 함양군을 거점으로 민심위무와 항전독려 및 의병모집 활동을 하였다.

[역사적 배경]

1592년 4월 13일, 왜적의 부산포 침입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4일이 지난 4월 17일에 조정에 급보가 전해졌다. 김성일은 일찍이 일본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왜적이 침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선조(宣祖)는 이미 4월 11일에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러 가던 김성일을 체포하여 국문토록 지시하였다. 임지로 가던 김성일은 경상남도 창원시에 도착하여 군사를 지휘하였고, 왜적과 조우하자 동요하지 않고 적병을 공격토록 하였다. 전투에서 적의 수급 2개와 준마와 보검 등을 빼앗은 전과를 보고하였고, 유성룡(柳成龍)의 변호 등으로 김성일을 체포하여 국문하도록 지시했던 선조는 김성일을 용서하였다. 그리고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하고, 함양군을 중심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경과]

일본 정세에 대한 오판으로 압송되던 김성일은 경상우병사로서 창원전투에서의 승전과 유성룡의 변호 덕분에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에서 죄를 용서받았고, 경상우도초유사에 임명되었다. 김성일은 공주·전주·남원·운봉을 거쳐 팔량치를 넘어 1592년 5월 4일에 함양군에 도착하였다. 그 직후에 군수 이각(李覺)을 독려하여 고을의 선비들을 모집하였다.

[결과]

김성일의 독려에 전임 현령 조종도(趙宗道)와 전임 직장(直長) 이노(李魯)가 응하였다. 조종도와 이노는 김성일이 1593년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할 때까지 보필하였다. 또한 김성일은 의령의 곽재우에게도 편지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고 독려하였다.

한편 김성일은 함양군에서 초유활동을 하였는데 조종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조종도의 누이동생은 판서 노진의 맏며느리였는데, 직접 노씨들의 피난처를 찾아가 창의를 권하였던 것이다. 노사상(盧士尙)이 먼저 합류하고, 노사상이 다시 통문을 보내 함양군의 향인들을 모집하면서 의병의 규모와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정경운(鄭慶雲)의 「고대일록」에는 당시 함양군에서는 노사상·노사예(盧士豫)·박손(朴蓀) 등, 안음에서는 정유명(鄭惟明)·성팽년(成彭年) 등, 삼가(三嘉)에서는 노흠(盧欽)·이흘(李屹)·박사제(朴思齊) 등, 산음은 오현(吳俔)·오장(吳長)·임응빙(林應聘) 등, 경상남도 의령군에서는 이운기(李雲紀)·곽재우 등이 동참했다고 전한다.

[의의와 평가]

정경운의 「고대일록」에 따르면, 함양군 외의 나머지 고을들도 유사를 미리 정하여 의거를 고취하고 흩어진 관병들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였다고 전한다. 김성일은 경상우도초유사로서 함양군을 거점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보다 체계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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