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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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貴山 |
영어공식명칭 | Gwi S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장혜금 |
몰년 시기/일시 | 602년 - 귀산, 아막성 전투에서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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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무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아막성전투 참전 |
[정의]
신라 진평왕 때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경계에서 일어난 아막성 전투에서 전사한 무인.
[가계]
귀산(貴山)[?~602]은 사량부(沙梁部) 출신 신라 무인이다. 아버지는 아간(阿干) 무은(武殷)이었으며, 6두품 신분인 것으로 추측된다.
[활동 사항]
귀산의 생애는 『삼국사기』 열전 편에 따로 기록되었고, 신라본기 진평왕 부분에서도 귀산의 전사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귀산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실천하여 귀감이 된 인물로서 중요하게 인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귀산은 같은 마을의 추항(箒項)과 어려서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귀산은 추항과 함께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隋)나라에 유학한 후 돌아와 가실사(加悉寺)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원광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였다.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준 가르침을 세속오계라고 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으로 하고[사군이충(事君以忠)], 둘째 부모를 섬기는 데는 효도로 하며[사친이효(事親以孝)], 셋째 벗을 사귀는 데는 믿음으로 하고[교우이신(交友以信)], 넷째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으며[임전무퇴(臨戰無退)], 다섯째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데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살생유택(殺生有擇)].
602년(진평왕 24) 8월 백제 무왕의 명을 받은 장군 해수(海讎)가 아막성(阿莫城)을 포위하였다. 아막성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의 성리산성과 성산리산성 등으로 비정(比定)[불확실하거나 분명하지 않은 어떤 물체에 대하여 그와 유사한 다른 물체와 비교하여 그 성질을 정함]되고 있다. 백제는 신라의 아막성을 탈취하여야 경상도 함양과 산청을 거쳐 옛 가야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막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경계를 이루는 교통 요충지이자 군사 요충지로, 신라와 백제 간에 쟁탈전이 치열한 곳이었다.
신라 진평왕은 파진간 건품(乾品)·무리굴(武梨屈)·이리벌(伊梨伐)과 급간 무은(武殷)·비리야(比梨耶) 등을 파견하였고, 귀산과 추항은 소감(少監)직[신라시대의 무관 관직]으로 함께하였다. 백제군은 후퇴하다가 매복하여 뒤쫓아가 공격하던 신라군을 기습하곤 하였다. 신라군의 후미에 있던 무은이 백제군의 갈고리에 걸려 끌어내려져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귀산이 임전무퇴 정신을 발휘하여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듣기를 ‘무사는 군인이 되어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하고 힘껏 싸웠다. 적군 수십 명을 죽이고 아버지 무은를 탈출시킨 다음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싸우자 신라군이 힘을 모아 공격하였다. 들판을 백제군 시체로 가득 채우고 말 한 마리나 수레 한 대도 돌아가지 못한 큰 승리였으나 귀산과 추항은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길 가운데서 죽음을 맞았다.
[상훈과 추모]
진평왕이 아나(阿那)의 들판에서 귀산과 추항의 시신을 맞아 통곡하고 나서 예(禮)를 다하여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귀산에게는 나마(奈麻) 관등, 추항에게는 대사(大舍) 관등이 각각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