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48 |
---|---|
한자 | 朴子安 |
영어공식명칭 | Park Jaan |
이칭/별칭 | 양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신은제 |
[정의]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무신.
[개설]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무장으로 왜구를 막고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가계]
박자안(朴子安)[?~1408]의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부인은 안동권씨 권렴(權廉)[1302~1340]의 아들 권현(權鉉)의 딸이다. 아들은 박실(朴實)[?~1431]과 박유(朴牖)이다.
[활동 사항]
1360~1370년대 박자안의 관직은 보마배행수별장(寶馬倍行首別將)이었다. 1384년(우왕 10) 진주목사 박자안은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윤가관(尹可觀)[?~1387]과 함께 함양군을 노략질하던 왜구를 격퇴시켰다. 1389년(창왕 1) 2월 해도원수(海道元帥) 박자안은 경상도원수 박위(朴葳)[?~1398] 등과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때 적의 배 300여 척을 불태우고 포로가 된 본국인 100여 명을 송환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박자안은 왜구 방어를 담당하였다. 다만 1397년(태조 6) 경상·전라도절제사로 임명되었을 때 참형에 처해질 뻔 하였으나 아들 박실이 정안군 이방원(李芳遠)[1367~1422]에게 읍소하여 목숨을 구하였다. 박자안이 참형을 당하게 된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왜적의 수괴 나가온(羅可溫)이 항복을 청하였는데 이를 원활하게 처리하지 못하여 나가온이 도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일에 대한 책임으로 박자안이 처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400년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명나라로 갔다가 1405년(태종 5) 경상도병마도절제사 겸 수군도절제사·중군도총제에 임명되었다. 1406년 공안부사(恭安府事)로 임명되었으나 곧 면직되었다.
[상훈과 추모]
1408년(태종 8)에 사망하였으며, 양혜(襄惠)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