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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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孟智 |
영어공식명칭 | Bark Maengji |
이칭/별칭 | 춘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동석 |
활동 시기/일시 | 1454년 - 박맹지, 식년 문과에 정과 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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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701년 - 박맹지, 구천서원에 배향 |
묘소|단소 | 춘당 박맹지 묘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
사당|배향지 | 구천서원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
사당|배향지 | 금호재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목동마을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반남 |
대표 관직 | 평사|훈도|승문원교리|사헌부집의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함양 출신 문신.
[개설]
박맹지(朴孟智)의 호는 춘당(春塘)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아버지는 박안경(朴安敬)이다. 1426년(세종 8)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나 1492년(성종 23) 67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출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활동 사항]
일찍이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1454년(단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55년(단종 3) 성균관에서 유생 교육을 담당하던 임시직 교수 가운데 하나인 권지학유(權知學諭)로 임명되어 원종공신 3등에 녹훈(錄勳)[훈공을 장부나 문서에 기록함]되었다. 그 이후로 세조가 여러 차례 직함(職銜)[벼슬, 직책, 직무 등의 이름]만 있고 직사(職事)[직무에 관계되는 일]가 없는 영직(榮職)[영예로운 관직]으로 발탁하려 하였으나 박맹지는 관직을 떠나 함양에서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1474년(성종 5) 다시 관직에 올라 평사(評事)가 되었으며, 북변(北邊) 병마사 어유소(魚有沼)[1434~1489]의 명으로 성종에게 대전(大箭)[물고기를 잡는 큰 어살], 매, 사냥개를 바쳤다. 이어 성종에게 육진(六鎭) 개척 이후 여진족 등 야인(野人)들의 사신이 조선에 올 때 횟수나 방법에 질서가 없어 조선이 보는 피해가 크다는 사실을 건의하였다. 야인들이 조선에 1년에 몇 번 방문할지와 방문 행렬 수를 정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그 뒤 훈도(訓導), 승문원교리, 사헌부집의 등 관직을 역임하였다.
[묘소]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목동마을에 금호재(琴湖齋)를 지어 박맹지를 추모하였다. 그러나 금호재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869년 봄에 중론을 모아 재실을 지었다.
1701년(숙종 27)에 구천서원(龜川書院)을 창건하면서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1449~1498], 일로당(逸老堂) 양관(梁灌)[1437~1507], 금재(琴齋) 강한(姜漢)[1454~?], 구졸암(九拙菴) 양희(梁喜)[1515~1580], 우계(愚溪) 하맹보(河孟寶)[1531~1593]와 함께 배향되어 있었으나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이후 박맹지 후손들이 돈을 모아 재실과 비를 유허지에 세우고 예를 드리다가 1984년에 구천서원을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