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풍속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183
한자 歲時風俗
영어공식명칭 Seasonal Customs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양하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매년 계절에 따라 관습적이고 의례적으로 행하는 생활양식이나 풍속.

[개설]

세시풍속은 1년을 단위로 계절의 변화에 따라 행해오던 풍습을 말한다. 이는 농경문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며, 농사의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문화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세시풍속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토속적이고 공동체적인 민간신앙의 정서 또한 지니고 있다.

[봄의 세시풍속]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봄 세시풍속에는 용알뜨기, 흙일하기, 고로쇠나무 수액 마시기, 삼짇날, 초파일 등이 있다.

용알뜨기는 우수와 춘분 사이에 있는 경칩 때 행해진 풍습이다. 경칩은 생물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땅속에서 나오는 시기로, 여인들은 이날 새벽에 마을 공동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온다. 사람들은 용이 맑은 물에 알을 낳는다고 믿어, 공동 우물에 제일 먼저 가서 물을 떠 오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물을 걸러서 깨끗한 그릇에 담아 장독대 위나 부엌 위에 놓는데, 이를 ‘정화수’라고 한다. 제일 먼저 물을 길어온 사람은 우물에 지푸라기를 넣어두고 가는데 이는 이미 용의 알을 떠갔다는 표시이다. 늦게 나온 사람은 다른 우물에 가서 용의 알을 떠가야 한다는 배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경칩에는 흙일하기도 행해졌다. 이날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 하여 진흙을 파다가 벽을 바르기도 하고, 허물어진 곳을 새로 쌓기도 하였다.

또한 경칩에 고로쇠나무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면 위장병이 없다고 한다. 이에 남덕유산이나 용추계곡, 백운산 계곡, 지리산의 여러 계곡에서 수액을 채취하여 마셨는데, 곡우보다 경칩에 마시는 물이 더 좋다고 한다. 고로쇠물은 여자물이라 하여 남자에게 좋고, 거제수물[자작나무수]은 남자물이라고 하여 여자에게 좋다고 하여 마셨다.

삼짇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 하였다. 이날 제일 먼저 보는 나비가 호랑나비나 노랑나비면 그해 소원이 성취되며, 흰나비를 보면 상복을 입게 된다고 믿었다. 옛날에는 진달래꽃이 피면 화전을 만들어 화전놀이도 즐겼다. 경상남도 함양군에서는 1945년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을 겪었던 80대들의 어린 시절에는 이미 화전놀이는 없었다고 전한다. 박애순[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한남마을, 늘비댁(생초), 86세]은 “삼월 삼짇날 머리 끄트머리를 잘라서 강에 던지거든. 그러면 머리가 잘 긴다고 그래 했어”라며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잘라서 강에 던졌다고 한다.

초파일은 석가탄신일인 4월 8일로, 많은 사람들이 절을 찾아가 불을 밝히며 소원을 빌었다. 부인들이나 할머니들은 이날 3개의 절을 밟으면 재수가 있다고 하여 세 군데의 절을 찾아 참배하고, 연등을 달아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여름의 세시풍속]

경상남도 함양 지역 여름의 세시풍속에는 유두, 기우제, 칠석, 백중 등이 있다.

음력 6월 15일을 유두일이라고 하여 수박이나 참외 등 새로 나온 과일과 국수, 떡을 만들어 사당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며 풍년이 되기를 빌었다. 쌀이 없어 떡을 못 하는 가정에서는 밀가루나 감자로 떡을 만들어 논이나 밭에 나가 고사를 지냈다. 대부분 마을에서는 논에 나가 물꼬 위에 삼대를 세워 놓고, 그 위에 떡을 꽂아 용신에게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때 물꼬의 삼대에 꽂아둔 떡을 논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풍습 또한 일제 강점기 때 사라졌다고 한다.

경상남도 함양군에서는 여름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는데 함양읍 천령봉, 서상면의 도천마을, 서하면의 방정마을·다곡마을, 백전면 운산마을, 안의면 죽당마을·교동마을 등에서 산신에게 기우제를 지냈다. 용신 기우제를 지내는 곳도 있는데 병곡면 송평마을, 마천면 추성마을, 서하면 반정마을에서는 임천강과 임천강 천변에서 지냈다. 또한 서상면의 신기마을, 서하면 반정마을, 백전면의 동백마을·평정마을, 수동면의 변동마을 등 일부 마을에서 기우제 때 부녀자들이 머리를 풀고 물가에서 통곡을 하기도 하고, 키로 물을 퍼 까불며 “용신님네 비를 내려 주이소”라고 외친다. 키를 까부는 것이 용의 꼬리로 물을 치고 흔드는 것과 같은 행위로 보아 함께 따라하고, 비를 내리게 한다는 교감 주술의 형태이다. 솥뚜껑 기우제는 서하면 봉전·병곡 등 일부 지역에서 행하였던 기우제이다. 솥뚜껑을 거꾸로 뒤집어 올려 흔드는 기우제로, 솥뚜껑을 뒤엎은 모습이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고 이를 흔들어 용신과 교접을 하는 행위이다. 이런 부정한 행위를 보지 않으려는 신에 의해 비를 내리게 해달라는 것이다. 괘불 기우제는 용추사에 있는 괘불을 메고 나와 광풍루에 걸어 놓고 괘불 기우제를 지냈다. 이는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인데, 광풍루에 괘불화상을 걸어 놓고 스님이 천수경 등 독경을 외우며 강우(強雨)를 기원하였다. 바위 기우제는 서상면의 오산마을, 안의면 두항마을·봉산마을, 수동면도북마을, 지곡면의 마산 등지에서 행해졌다. 이 마을들은 마땅한 산이 없고 강이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을 근처의 큰 바위에 가서 제물을 차려놓고 가축의 생피를 바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지냈다.

칠석에는 칠석날 밤, 처녀들이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길쌈 솜씨가 세련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불임의 여인들은 몸을 깨끗이 씻고, 바위에 제물을 차려 정성스럽게 빌었다.

백중은 머슴의 날이라고도 한다. 머슴을 둔 주인들은 머슴들을 쉬게 하고, 머슴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마련하였다. 머슴들은 이날을 호미를 씻고 발을 씻는 날이라 하여 냇가에 나가 농악 놀이를 하고, 씨름판을 벌였다. 그리고 호박적, 깻잎적, 부추적, 파적 등을 구워 먹었다. 이날 주인은 머슴에게 새 옷을 지어 주며 위로금을 주기도 하며,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혼인을 시켜주기도 하였다.

[가을의 세시풍속]

음력 9월 9일은 양의 수 가운데 가장 큰 수가 겹치는 날로 중양절이라고 한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는 국화꽃을 따서 국화전을 부쳐 먹고, 유자의 열매와 배를 잘게 썰어 꿀물에 넣고 석류와 잣을 섞어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 이날은 경로와 위안 잔치를 베풀어 복을 구하였다. 또한 액을 때우기 위해 시냇가에 나가서 손을 비비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그 속에 돈을 넣어 징검다리 곁에 두기도 하는 무속적 민속을 행하기도 하였으나 오래전에 사라졌다. 박찬조[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한남마을, 전 이장, 2018년 기준 69세]의 전언에 의하면 그날만큼은 하늘 문이 열려서 모든 귀신이 내려오는 날이라 단체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돌아가신 날짜가 다른 어르신들의 제사를 9월 9일에 한 번에 지내기도 하였는데, 당시 한남마을에서는 중양절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찬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쌀쌀하게 되는 10월의 상달이 되면 햇곡식으로 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서 조상을 대접하였다. 이를 ‘시제사’ 혹은 ‘시제’라 하였다. 묘제를 지내거나 성주받이굿을 하여 가택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시제는 보통 4대조까지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5대조 이상의 조상은 묘제를 지내는데, 이를 시사·묘사·시향이라고 한다. 성주받이굿을 할 때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한다. 먼저 조상신에게 빌고, 그다음은 장독대로 가서 천룡-고방-소막 등의 순서로 빈다. 이때 “쌀섬에는 불이 나고, 나락섬에 나비나라”고 빌거나, “오곡백과 다 부루어 주고 녹두까지 부루어 주소”라고 빌었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는 가을에 무당에게 아이를 파는 풍습이 있었다. 무당에게 아이를 팔면 수명이 길어진다고 하고, 아이 이름도 ‘판개, 판돌이, 판기’ 등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이때 아이를 산 무당에겐 삼베로 만든 긴 자루에 쌀을 가득 담아주었다.

[겨울의 세시풍속]

동지는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이날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팥죽을 쑤어 차례를 지내고, 죽물을 대문이나 벽에 뿌려 재앙과 액을 막았다. 팥죽에는 찹쌀가루로 경단을 새알만 하게 빚어서 넣었는데, 이 새알을 먹어야 나이를 1살 더 먹는다고 하였다. 박애순은 “동지에 팥죽을 끓여서 집 안 고랑에다가 흩고 갈라묵고 하였는데, 지금은 미신이라고 안 하지.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 누가 끓여. 자식들 키울 때는 다 하였지”라고 전한다. 한동안은 마을회관에서 팥죽을 끓여 마을 어르신들과 나눠 먹기도 하였지만, 현재는 마을회관에서도 팥죽을 끓이지 않아 동지에 팥죽을 해 먹는 풍습이 거의 사라졌다 전한다.

그믐은 한 해의 마지막 날로 이날을 제석·제야라고도 한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는 묵은 한 해를 청산하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에서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하였다. 집 안 앞마당과 뒤뜰도 깨끗이 청소하고, 거름더미도 깨끗이 정돈하였다. 소와 돼지의 우리도 깨끗이 들어내고 새 짚을 넣어서 깔아주었으며, 부엌이나 축담 등 흙이 떨어진 곳에는 흙을 발라 깨끗이 단장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묵은해의 잡귀나 잡신들, 역병이나 부정한 것을 없애고 정결하게 새해를 맞기 위함이었다. 이날 밤에는 방, 대청, 부엌, 광, 우물 등에 불을 밝히고 밤을 새웠다. 이를 수세(守歲)라고 하는데, 불을 밝혀 잡귀를 막고 복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은 각 마을마다 성황당이나 성황단에 제사를 올렸는데, 이를 ‘성황제’라 부르며 정월에 지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풍습으로, 산간고개 길에 돌멩이가 쌓여져 금줄을 쳐 놓은 곳이 있으면 성황대 흔적으로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는 마을의 입구나 큰 거리, 삼거리 혹은 사거리 등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 사람들이 많이 죽은 집 대문 앞, 물에 빠져 죽은 장소, 객사한 길목에서 거리제를 지냈다. 이러한 거리제는 부정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개 정월 대보름 직전에 무당의 굿으로 진행이 되는데, 거리굿은 별신굿이나 씻김굿을 마지막에 하기도 하였다. 이는 원귀를 위로하고 저승에 보내주어, 재앙이 없기를 바라는 굿이었다. 거리굿은 개인적인 재앙을 풀기 위해 어느 한 집이 주동이 되어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마을 전체의 액을 풀기 위해 마을 공동비용으로 거리제를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무신제는 백무동에서 섣달그믐에 무당들이 신내림을 받거나 신의 영험을 얻기 위해 올리는 제(祭)였다. 특히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는 백무동 계곡에 무당들이 모여 무신제를 올렸는데, 백무동의 명칭부터 100명의 무당이 난 곳이라 하여 영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신밟기는 정월에 마을과 가정의 무사태평을 기원하기 위해 정초부터 대보름 전후까지 행하였다. 당산과 마을 공동우물을 비롯하여 집집마다 지신밟기를 하는데, 함양의 지신밟기는 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마당에는 당산의 마을신을 모시는 자리이다. 이때는 당산에 술과 안주를 차려 놓고 분향재배한 후 “지신, 지신, 지신아 당산 지신을 울리자. 이 동네 농민들은 남녀노소 막론하고 단명자 수명장수……” 하면서 사설을 늘어놓는다. 둘째 마당에는 공동우물에 가서 하는 샘신을 위한 고사이다. 이때도 “지신, 지신, 지신아 우물 지신을 울리자…… 7년 대한 가뭄에서 쉬지 않고 흐르소서. 마을 사람 모두가 돌림병 없이 건강하게 하옵소서” 하면서 주위를 밟고 돌면서 농악을 울리며 한바탕 논다. 셋째 마당은 김생원댁 지신풀이로 김생원댁을 필두로 하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터를 울리는 것이다. 마당 지신풀이, 성주 지신풀이, 천령 지신풀이, 새미 지신풀이, 장독대 지신풀이, 짐승 마구 지신풀이, 두주 지신풀이, 방아 지신풀이, 조왕 지신풀이가 있다. 집주인은 농악패가 찾아오면 술과 떡과 과일 등을 차려 놓고 일행을 대접한다. 이때 풍물패가 지신을 밟은 대가로 곡식이나 돈을 내놓게 되는데, 이렇게 모은 곡식과 돈은 마을의 기금으로 쓰였다.

디딜방아 훔치기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지곡면 공배마을, 수동면 변동마을·도북마을, 서상면 신기마을·방지마을·수개마을, 백전의 백운마을 등에서 행해져 왔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면 공동우물을 통해서 전염병이 퍼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예방하기 위한 액막이 풍습으로 행해져 왔다. 특히 마마[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한 액막이로 여러 마을에서 행해졌다. 이웃 마을의 어느 집에 있는 디딜방아를 밤중에 훔쳐오기 위해 마을 아낙네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지정한 날짜에 방아를 훔치러 간다. 무사히 훔쳐서 나오면 다행이지만, 주인에게 들키면 방아를 훔치지 못한다. 자기 집의 방아를 도둑맞은 것을 주인이 알면 방아를 못 훔쳐가게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그러면 훔치러 갔던 사람들은 몰래 나와야 한다. 하지만 방아를 무사히 훔쳐 나오게 되면 주인이 알았다고 하더라도 돌려달라고 하지는 못한다. 일단 집 밖으로 나온 방아는 부정을 탔다고 보기 때문이다. 집 밖으로 옮겨진 디딜방아는 여인들이 양옆에서 둘러매고 상여매기 소리를 하며 자기 마을로 옮겨갔다. 이때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상주 흉내를 내며, “어이, 어이” 곡을 한다. 마을로 옮겨진 상여는 다음날 아침 당산나무 주위에 세운 후 왼 새끼에다 붉고 푸른 천을 엮어 당산나무 주위에 둘러쳐 놓는다. 방아는 머리 쪽을 아래로 하고 다리를 위로 세워 여인의 고쟁이를 입히고, 동쪽으로 향하게 세워둔다. 제물로는 백시루떡을 해서 한가운데 칼을 꽂아 둔다. 제관이 액을 쫓는 사설을 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한 사람씩 나와 자기 집안의 재액을 물리쳐 달라고 하고, 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음복을 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