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1257 |
---|---|
한자 | 黃石山城-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남기민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4년 12월 15일 - 「황석산성 피바위」, 『우리고장의 전설』에 수록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2년 11월 30일 - 「황석산성 피바위」, 『함양군사』 3권에 수록 |
관련 지명 | 황석산성 피바위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
성격 | 설화|열녀담|지명 유래담 |
주요 등장 인물 | 옥녀부인 |
모티프 유형 | 남편의 원수 갚는 아내|왜군에 맞서 싸운 백성|경계 |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 황석산성 피바위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
[개설]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에서 관군이 패하여 도망하자, 옥녀라는 젊은 부인이 왜병을 부엌칼로 찌르고 성벽으로 몸을 던지자 많은 아낙들이 따라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4년 함양문화원에서 간행한 『우리고장의 전설』의 276쪽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1597년 정유년에 왜적이 재차 침략을 해왔을 때 경상남도 안의, 거창, 함양 3개 읍의 백성과 군사들은 황석산성을 지키고 있었다. 왜적은 호남 진출에 장애가 되는 산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산성에 있던 관군과 의병, 백성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시일이 지나자 초조해진 왜적들은 전 병력을 투입시켜 산성을 함락시키려 하였다.
당시 김해부사 백사림은 겁을 먹고 북문을 열고 달아나고 말았다. 열린 북문으로 왜적이 쳐들어 왔고 성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 성 안에는 옥녀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의병으로 출전하였던 남편이 왜적의 손에 죽자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성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옥녀는 다가오는 왜병을 부엌칼로 찔러 죽이고 나서 잡혀서 수치를 당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결심을 하고 몰려드는 왜병을 피해 서편 성벽으로 달려가 몸을 던졌다. 이를 보고 다른 부녀자들도 따라서 벼랑에 몸을 던지니, 벼랑 아래 바위가 붉은 피로 물들었다. 이 바위를 피바위라고 이른다.
[모티프 분석]
「황석산성 피바위」의 주요 모티브는 산성에 있는 피바위의 이름과 관련된 지명 유래담이다. 또한 의병으로 나갔다가 왜적에 의해 죽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적에 맞서 싸운 아내의 이야기이며, 여인의 몸으로 잡혀서 수치를 당할 바에야 죽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린 열녀담으로 볼 수 있다. 이야기 중간에는 백성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음에도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려 도망친 김해부사 백사림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에 대해 비판을 가함으로써 사명을 저버린 위정자를 비판하고 배반한 행위를 경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