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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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肯構堂金重鼎墓碣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호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영미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02년 - 김중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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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89년 - 김중정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889년 - 「긍구당 김중정 묘갈명」 저술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25년 - 「긍구당 김중정 묘갈명」 『진안지』에 수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2004년 - 「긍구당 김중정 묘갈명」 『진안군 향토 문화 백과사전』에 수록 |
성격 | 비명 |
작가 | 김중정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호계리에 살았던 긍구당 김중정의 묘갈명.
[개설]
「긍구당 김중정 묘갈명(肯構堂 金重鼎 墓碣銘)」에는 “긍구당 김공 중정 묘갈명(肯構堂金公重鼎墓碣銘)”이라고 적혀 있으며 박성양(朴性陽)이 1889년에 지었다. 현재 비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묘갈명의 내용은 1925년에 편찬한 『진안지(鎭安誌)』와 2004년에 편찬한 『진안군 향토 문화 백과사전』 부록에 실려 전하고 있다.
김중정(金金重鼎)[1602~1689]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호는 긍구당(肯構堂), 자는 자삼(子三), 본관은 광산이다. 공안공(恭安公) 의정부 좌찬성 겸광(謙光)의 현손으로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항복하자 진안으로 내려와 주자천 하천가 와룡암 위에 강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며 89살에 생을 마쳤다.
[구성]
긍구당 김중정의 묘갈명은 사헌부 대사헌 박성양(朴性陽)이 1889년에 지었는데 앞 부분에 명을 짓게 된 동기가 있고, 이어서 네 글자로 맞춘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銘)은 김중정의 선조, 김중정의 활동 사항, 김중정의 후손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긍구당 김중정 묘갈명」의 내용은 크게 명(銘)을 짓게 된 동기를 서술한 서(序) 부분과 명(銘) 부분으로 나뉜다. 서에는 용담에 사는 김재열이 그의 조부 김중정의 행록과 문고를 가지고 와서 박성양에게 명을 써 줄 것을 부탁하고 박성양이 그 부탁을 허락한 내력이 적혀 있다. 명 부분은 김중정의 선조, 김중정의 활동 사항, 몰년과 묘소 위치, 부인의 사람됨, 김중정의 일곱 아들에 대한 소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중정의 선조는 광성 부원군 김겸광(金謙光)에서 시작하여 김극심(金克心), 김온윤(金溫胤), 김인수(金仁秀), 부친 김한룡(金翰龍)으로 이어진다. 김중정은 어려서부터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1632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자 그 이듬해 1637년 36살 되던 해에 조부 김충립(金忠立)을 따라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버리고 진안군 주천면에 들어왔다고 한다.
진안군 주천면은 주자(朱子)를 연상케 하는 주천(朱川)과 정자(程子)를 연상케 하는 정자봉(程子峰) 등이 있어서 숨어 살며 자정(自靖)의 뜻을 굳건히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후 김중정은 운일암 반일암의 선경에 마음을 달래며 조용히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고, 그 덕에 고을 젊은이들이 어리석음을 많이 깨우쳤다고 한다.
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김시흥, 김시성, 김시준, 김시건, 김시찬, 김시감, 김시경 등 김중정의 일곱 아들을 소개하여 후손이 번창함을 말하고 있다.
[특징]
다른 묘갈명이 보통 병서(幷序)에서 주인공의 행적 등을 모두 상세히 설명하는 것에 반해, 「긍구당 김중정 묘갈명」은 병서를 짧게 쓰고 4글자 명으로 그의 선조, 활동 사항, 후손 번창 등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간략한 명으로 김중정의 생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간략하지만 그가 ‘고을 젊은이의 어리석음을 깨우쳤던’ 교육자임이 잘 부각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긍구당 김중정 묘갈명」은 김중정의 학문과 교육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그는 와룡암을 건립하여 서민 교육의 장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진안 주양리 지역에서는 1908년 선구적으로 근대 학교인 화동 학교(華東學校)가 설립되어 지역 민족 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따라서 산수가 수려한 진안 지역에서 지조를 지키며 학문과 후학 교육에 힘썼던 김중정의 발자취를 탐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