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보 진양속지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여진(汝眞), 호는 후산(後山). 진사에 합격하고 행의(行義)가 곧아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 후산정(後山亭)을 세웠으며 유집이 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4「사마조(司馬條)」에 이름이 올랐으며,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관련 기록이 있다....
-
조선 후기의 효부. 정유재란 때 일본군 정벌의 대장으로 활약했던 정기룡(鄭起龍)[1562~1622]의 딸로, 함양인 박태홍(朴泰弘)의 아내이다. 『증보 진양속지』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정숙하더니 시집가서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공경하였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남편이 병사하니, 정씨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부모가 살아 계심에 손수 염습과 장례를 치렀다. 이후 시부모를 지성으로...
-
조선시대의 문인.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은철(殷喆), 호는 퇴암(退庵). 진사(進士) 정광룡(鄭光龍)의 아들이다. 진주 용암에 살았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어버이를 섬김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찍이 들로 가다가 고인(雇人)이 피를 뽑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정계교에 말하기를 "고인이 벼를 뽑고 있었다"고 하므로 정계교가 "벼가 아...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대현(大見), 호는 석동(石桐)이다. 1882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자품(資稟)이 준정(峻整)하고 기우(器宇)가 헌앙(軒昻)하며 풍채가 사람에게 선학(仙鶴)과 같이 비추고 문학이 일찍부터 뛰어났다. 만년에는 강좌를 용암(龍岩)의 장덕재(章德齋)에 설치하니 원근에서 찾아와서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4「사마...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치경(致敬), 호는 기재(跂齋)이다. 아버지는 정인현(鄭麟賢)이다. 진주 용암 출신으로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효우(孝友)스럽고 염직(廉直)하여 영리(榮利)를 구하지 아니하고 착한 일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병정(丙丁:병자·정축년, 1876~1877년)의 흉년에 베풀기를 좋아하는 기재(跂齋)의 덕으로...
-
근대의 한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성칠(聖七), 호는 성재(誠齋). 정도역(貞度易)의 후손이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초학은 정재(正齋) 김종우에게 받았고 의문이 있으면 간재(艮齋) 전우(田遇),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에게 서신으로 질의하며 깨우쳤다. 만년에는 단계(丹溪)에 옮겨가 살면서 매서 김극영, 금호 박희방, 능재 권의현, 과제 이교우...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자는 성익(聖翼), 호는 학주(鶴洲).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진주 가곡 출신이다. 1890년(고종 27)에 문과에 올라 승지(承旨)가 되었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풍채가 수미(秀美)하고 문학이 넉넉하고 풍족하여 향당(鄕黨)에서 이를 칭찬하였다....
-
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복여(福如), 호는 운파(雲坡).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천성이 영민(穎敏)하고 재예(才藝)가 남들보다 출중하였다. 김단계(金端磎), 박만성(朴晩醒)을 따라 학문을 연마하였다. 고려 말 문신이었던 정온이 태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우곡정(隅谷亭)[경상남도 진주시 사...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호여(浩汝)이다. 1837년(헌종 3)에 문과 병과에 올랐다. 이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를 역임하였고, 1849년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가훈을 잘 이어받아 부귀영화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4「문과조(文科條)」와 『증보 진양속지(晋陽續誌)』에 관련 기록이 있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 자는 진백(晉伯), 호는 태계(台溪). 대사간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에 급제하였고, 163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부모봉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상주지방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성태동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효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