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36 |
---|---|
한자 | 李聖求 |
이칭/별칭 | 자이(子異)/분사(分沙)/동사(東沙)/정숙(貞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병무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현감을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동사(東沙). 태종의 아들인 경녕군(敬寧君) 이비(李示+非)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판서 이희검(李希儉)이다. 아버지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저자인 이조판서 이수광(李睟光)이고, 어머니는 도사공(都事公) 김대섭(金大涉)의 딸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어머니의 여동생이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蛟山) 허균(許筠)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이성구(李聖求)[1584~1644]는 1603년(선조 36)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곧 한림원(翰林苑)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광해군 초기에 전적·감찰에 이어 예조·병조·형조좌랑, 부교리·헌납·병조정랑·교리 등을 두루 거쳤다. 1613년(광해군 5) 헌납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대사헌을, 동생 이민구(李敏求)는 홍문관 수찬을 지냄으로써 3부자가 모두 삼사(三司)의 언관직에 재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영창 대군(永昌大君) 역모 관련 옥사가 일어나자 시론(時論)에 반대하였으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을 천거하여 종성 판관이 된 일로 대북 세력의 탄핵을 받자 이를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이천 현감을 거쳐 1616년(광해군 8) 영평 판관이 되고, 겸하여 포천 현감으로서 포천현을 다스렸다. 1618년(광해군 10) 이항복이 북청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포천 백성들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서원을 세워 봉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1620년(광해군 12) 대북 세력의 미움을 받고 사간원의 탄핵으로 결국 파직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 정권이 수립된 후 사간으로 발탁되어 폐해가 심한 정치를 일신하였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인정을 받아 강화 부윤·부승지·예조 참의를 거쳐 1625년(인조 3)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이조참의로서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전주까지 호종하였다. 곧이어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좌승지가 되어 함경도 지방을 왕래하며 민심을 수습하였다. 당시 국왕의 측근 신하라 하여 지역 백성들이 곤궁한 사정을 하소연하자 이를 정리하여 국왕에게 진달하였다. 얼마 후 전라 감사로 나아갔는데 아버지가 병에 걸려 위중하였다. 조정에서 지방관인 그를 교대하지 않고 귀향케 하여 아버지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특혜를 주었다.
이후 병조참판·대사헌·형조참판·경기 감사 등을 지냈으며, 1636년(인조 14) 형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와 체찰 부사를 겸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국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하지만 그의 아내 권씨는 강화가 적에게 함락되자 두 딸, 며느리 등과 함께 목을 매고 자결하여 가정적으로는 큰 불행을 당하였다. 한편, 당시 조정에서는 주전론(主戰論)과 주화론(主和論)이 맞섰는데, 이때 그는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에 동조하였다. 1637년(인조 15) 좌의정으로 재직 중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鳳林大君) 등이 청나라 인질로 심양(瀋陽)에 갈 때에 수행하였다. 그해 귀국하여 국왕에게 소현 세자와 삼학사(三學士)의 근황을 보고하고 향후 청나라와의 관계 등을 논의하였다. 이듬해 영돈령부사가 되고 1640년(인조 18) 사은사로 청나라에 가서 명나라를 공격할 원군을 보낼 수 없다는 내용을 전하고 왔다.
1641년(인조 19)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승지 홍무적(洪茂績)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 선천 부사 이계(李烓)가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문제는 청나라의 기밀을 누설한 혐의로 확대되었고, 조정에서는 이계를 죽여야 한다는 의논이 많았다. 이에 대해 그는 보다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주장하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고, 이계 역시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 후 양화강 부근에 직접 만휴암(晩休庵)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시문을 논하며 지냈다. 어느 날 집에 불이 났는데, 그는 밭둑에 나와 있다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고 “술독은 탈이 없느냐, 술을 따라 이웃 사람들에게 사죄하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한 그 지역 백성을 권장하여 ‘서호 향약기(西湖鄕約記)’라는 향약을 제정하여 풍속을 교화하였다. 다시 영중추부사에 임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향촌에 살다 죽었다. 실록에서는 그에 대하여 ‘광해군 때 인목 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고 인조반정 초기 맨 처음 발탁되었으며, 사람됨이 순후(純厚)하고 점잖았다.’라고 평가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문집인 『분사집(分沙集)』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90-1에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