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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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龜錫 |
이칭/별칭 | 채두석(蔡斗錫),대여,초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한림면 한림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규복 |
출생 시기/일시 | 1850년 - 채구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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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79년 - 채구석 소과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893년 - 채구석 제주 판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95년 - 채구석 제주 판관에서 대정 군수로 전임 |
활동 시기/일시 | 1898년 - 채구석 화전민란으로 대정 군수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899년 7월 - 채구석 대정 군수 재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01년 - 채구석 이재수의 난으로 대정 군수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903년 11월 - 채구석 석방 |
몰년 시기/일시 | 1920년 - 채구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58년 - 채구석 기적비 건립 |
출생지 | 채구석 출생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 |
거주|이주지 | 채구석 거주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
사당|배향지 | 채구석 기적비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2785번지[N33°15´01.4558˝, E126°25´13.6415˝] |
성격 | 문신|군수 |
성별 | 남 |
본관 | 평강(平康) |
대표 관직 | 제주판관, 대정군수(大靜郡守) |
[정의]
1901년 제주민란[신축민란] 당시 대정군수을 지낸 문신.
[개설]
1901년 제주민란은 ‘신축민란‘ 또는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하며 최근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민란이 발생했던 1901년 당시 제주 도민들은 일본 어민의 어장침탈과 서울서 내려온 관리들의 횡포, 왕실 세금을 걷기 위해 내려온 봉세관의 무리한 세금부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여기에 전통신앙을 중시하는 제주도민과 외부종교인 천주교와의 갈등에다, 외부 세력을 배경으로 작폐(作弊)를 일삼은 일부 천주교인으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거부감도 극심하였다.
유림 오대현의 첩을 천주교도인 대정군의 부이방(副吏房) 김옥돌(金玉乭)이 간음한 사건이 발생되어 제주도민과 천주교도가 충돌하였고, 거기에 제주도민 오신락(吳信洛)이 천주교 정의교당에서 피살되는 사건까지 발생하여 민심이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1901년 5월 16일 이재수의 지휘로 수천명의 도민이 제주성을 포위, 함락하여 삼백여명이 넘는 천주교도를 죽였다. 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었다 하여 천주교에서는 이 사건을 ‘신축교난’이라고 부른다.
[가계]
채구석의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대여(大汝). 호는 초은(樵隱)이다. 아버지는 채종관(蔡宗寬), 어머니는 홍씨(洪氏)이다. 형제로는 형인 채희석(蔡禧錫), 동생인 채우석(蔡禹錫)이 있다.
[활동 사항]
채구석은 1850년(철종 1)에 한림리에서 태어나 제주성 내에서 살다가 후에 현 서귀포시 중문동으로 이주하였다. 나이 30세인 1879년(고종 16) 식년(式年) 소과(小科)에 2등으로 입격(入格)하였다.
이후 채구석은 1893년(고종 30)에 김응우(金膺友)의 후임으로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제주판관을 재임하던 시절인 1894년(고종 31년) 제주는 거듭된 흉년으로 몹시 힘들었다. 이처럼 진휼이 시급한 때에 채구석은 자기 봉급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돌보았다
1895년(고종 32)에는 이익제(李益濟)의 후임으로 대정군수(大靜郡守)로 전임되어 1896년(고종 33)에 장세(場稅)와 화전세(火田稅) 등에 불만을 품은 강유석(姜瑜奭)과 송계홍(宋啓弘) 등의 주도에 의해 일어난 소요인 병신민요를 진압하였다.
1898년 화전민 방성칠(房星七) 등이 가혹한 세금에 저항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그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가 이듬해인 1899년(고종 36) 7월에 신재우(愼哉祐)의 후임으로 재차 다시 대정군수로 부임하지만, 일명 ‘이재수의 난’이라 불리는 신축민란(辛丑民亂)의 책임을 떠안고 다시 파직당하였다.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기 전 채구석은 유림(儒林) 오대현(吳大鉉)과 관아의 노비였던 이재수(李在守) 등과 함께 상무사(商務社)를 설립하여 그 자신은 회장으로, 오대현과 같은 출신의 유림(鄕儒) 송희수(宋希洙)를 부회장으로 선임하여 상무사를 주도하였는데, 상무사는 토착세력으로 외부 세력인 천주교인과의 충돌이 잦았다.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 채구석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상무사를 해체시켰으나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이 상무사의 대표격이었던 채구석을 사건의 책임자로 조정에 무고하여 대정군수에서 파면시켰고, 1901년 6월 13일 채구석은 민란의 주동자였던 오대현·이재수 등과 제주도민의 원성을 받던 봉세관 강봉헌과 함께 황성(皇城)에 압송되었다. 이때, 프랑스 공사 플랑시(plancy. c)는 압송된 자의 처벌과 배상금을 요구하였고, 오대현·이재수·강봉헌 3인은 교수형을, 채구석은 구인(拘引)되어 금고생활(禁錮生活)을 하게 되었다. 이후 채구석의 석방을 위해 제주도민들이 청원하였고, 홍종우(洪鍾宇) 신임 제주목사도 채구석의 석방을 프랑스인 신부 라크루(Marcel Lacrouts)에게 요청함으로써, 배상금 문제를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1903년 11월 중순 석방되었다.
만년에 채구석은 중문(中文) 천제연(天帝淵)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할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들어 성천봉(星川峰) 아래의 5만 여 평의 논밭을 개간하게 하였다. 이때 이일을 도운 이재하(李載廈)·이태옥(李太玉)과 함께 공동 수주(水主)가 되었다. 1957년 8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중문동 천제연에는 『통훈대부 대정군수 채구석 기적비(通訓大夫大靜郡守蔡龜石紀蹟碑)』가 세워졌다.
[상훈과 추모]
채구석의 천제연(天帝淵)의 물을 농용수로 이용한 수로개척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58년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 2785번지에 채구석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통훈대부 대정군수 채구석 기적비(通訓大夫大靜郡守蔡龜石紀蹟碑)’라 음각되어 있으며, 뒷면과 우측면에는 그의 사적(事跡)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비석의 좌측면에는 ‘단기 4291년 무술 춘 찬조자 답주 일동(檀紀四二九一年戊戌春贊助者畓主一同)’이라 새겨져 있다. 비석의 규격은 가로 56.5cm, 높이 142cm, 폭 22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