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007 |
---|---|
한자 | 北接東學農民軍-梅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지수걸 |
[정의]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때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최후 전투지.
[개설]
서산 지역은 일찍부터 동학이 왕성하던 곳이었다. 특히 서산 지역의 농민군은 1894년 북접 농민군이 내포 지역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킬 때, 예포 농민군의 주력군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포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운 홍주성 전투는 전주성 전투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현재 서산시 소탐산에 위치한 매현(梅峴)은 서산 지역 농민 전쟁의 마지막 전투지였다.
[배경]
홍주성과 해미읍성 전투에서 패배한 내포 농민군은 이후 구산성과 저성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여기서도 패하자 당진·면천·서산·태안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중 서산 매현에 진을 친 농민군 수는 천여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서산·태안 사람이었다.
[전투 양상]
1894년 10월 1일 태안과 서산 관아를 습격하면서부터 본격화된 서산 지역의 농민전쟁은 10월 28~29일에 전개된 홍주성 전투 패배 이후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홍주성 전투 이후 농민군은 해미성, 귀밀성, 도투성[猪城] 등에 유진하며 저항하고자 했으나, 관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서산 지역 매현 전투의 실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관군 측 자료는 『양호우선봉진일기』이다. 위의 자료에 따르면 1894년 11월 8일[양력 12월 4일]경 서산 지역을 순시하던 관군이 매현 지역에서 일단의 농민군을 발견한 뒤 토벌 작전을 벌였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관군은 농민군이 저녁밥을 먹을 때 일제 공격을 가하여 농민군을 해산시킨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매현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은 전의를 상실한 채 무방비 상태로 둔취해 있다가 농민군의 동향을 예의 감시하고 있었던 관군의 습격을 받고 대오가 완전히 흐트러지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매현 전투에서 관군이 노획한 무기는 대포 1문, 천보총 7자루, 조총 7자루, 창 16개, 광검(光劍) 1개, 칼 2자루, 포란(砲卵) 1되, 징 4개 등이었다.
매현 전투 등 일련의 전투에서 패배한 서산 지역 농민군은 대오를 이루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태안 백화산 등지로 피신한 것으로 보인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는, 태안 백화산에 비류들이 모여 있다는 첩보가 들어와 서산에 주재하는 순무영 선봉진 별군관 등이 출동하여 거괴(巨魁) 유규희·최성서·최성일·안순칠·만석 등 다섯 사람을 체포하여 죄상을 밝히고 서울로 압송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민군은 체포 즉시 집단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서산·태안 지역 노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11월 중순경 백화산에 피신하였다가 퇴로를 차단한 농민군은 교장바위 인근, 모래기재, 태안여고등학교 인근 개울, 샘골마을, 남문리 냇가, 정주내 등지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집단 학살되었다고 한다.
백화산에서 학살을 모면한 농민군은 태안군 근흥면 수룡리 토성산으로 도피하였으나 그곳에서도 역시 많은 농민군이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회고에 따르면, 관군들은 농민군을 체포하면 먼저 태안군 근흥면 수룡리 353번지 김중석의 집 곳간에 가두었다가 차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집단 학살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북부 대장 이치봉의 경우는 “토성산에서 멍석에 말아 작두로 목을 잘라 죽인 후 효수경중(梟首警衆)이라는 형벌로 목을 장대 끝에 매달고 이곳에서 50여 리나 되는 원북면 방갈리까지 행진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서산 지역의 경우 1895년 정월 무렵까지 여기저기서 토벌이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추정 전투지]
내포 동학 농민군의 마지막 전투지인 서산 매현은 부춘산 마사라는 설과 서산시 수석동 소탐산 북편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서산 관아에서 동학군이 밥 짓는 연기를 보았다는 기록을 미루어 보아, 매현은 서산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6㎞ 지점에 위치한 소탐산 북쪽 능선 고개로 여겨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매현의 능선 서쪽은 서산시 수석동 산93-3번지, 능선 동쪽은 음암면 신장리 산 68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향토사가들의 주장[이영하]에 따르면, 이런 추정은 이 일대에 ‘매현’이라는 지명이 전해 온다는 점, 갑오년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매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촌로의 증언, 요새로서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 해미성과 거리가 비교적 가까운 점 등에 근거한 것이라 한다.
서산 지역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매현이라는 명칭은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하나가 마치 매화나무 가지와 같은 형상, 즉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명당이라고 해서 붙은 것이다. 서산시 매현과 태안군 백화산은 궁지에 몰린 농민군이 그야말로 ‘골로 간’ 곳이었다.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진 수필 「청춘예찬」을 쓴 민태원(閔泰瑗)은 매현 아랫동네, 즉 매동마을 출신이다.
[의의와 기념사업]
내포 지역 동학 농민 전쟁에는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농민과 동학교도들이 고루 참여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농민군의 중심 대오가 결성되고, 또한 그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곳은 해미와 서산이었다. 이는 내포 농민군의 주력이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들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패전 이후 농민 전쟁에 참여했던 서산 지역의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뱃길로 인천이나 황해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한편 고향에 그대로 남았던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천도교도로서 동학 정신을 계승하고 지역 사회 운동의 발전에 여러모로 기여하였다.
서산·태안 지역의 동학 농민군 후손들은 선조들의 의로운 투쟁을 선양하기 위하여 1964년 동학정신선양회를 조직하고, 1978년 10월 2일 백화산 산록에 추모탑을 건립하는 등 많은 활동을 벌여왔다. 1998년 많은 유족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결성된 것은 이러한 노력의 소산이었다.
2003년 4월 국회에서 「동학 농민 혁명 참가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서산·태안 지역의 동학 관련 기념사업은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동학 농민 혁명 참가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하여 2005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유족 등록 사업의 결과 서산 지역 64명, 태안 지역 133명이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참여자’로 인정받았다. 당시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참여 사실이 인정된 건수는, 고부 봉기와 황토현 전투가 치러진 정읍 지역이 45명, 1차 농민 봉기 기포지인 고창 지역이 4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후에도 서산·태안 지역 유족들은 매년 위령제를 치름과 동시에 후손들의 회고들을 모아 자료집을 발간하는 등 각종 선양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