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3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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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百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정재윤 |
[정의]
삼국 시대 충청남도 서산 지역을 관할했던 국가.
[개설]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하여 서기 660년에 멸망하기까지 지금의 충청도·경기도·전라도 일대를 관할했던 고대 왕국이다. 백제의 역사는 수도 이전을 기준으로 한성(漢城) 시대[B.C. 18~A.D. 475], 웅진(熊津) 시대[A.D. 475~538], 사비(泗沘) 시대[A.D. 538~660]의 세 시대로 대별될 수 있다.
한성 시대에 백제는 남으로 마한 소국 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서산 지역 세력과 첫 대면하고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산 부장리 고분군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이후 475년 웅진 천도로 백제가 지방 통치를 강화하면서 서산 지역을 관할 행정 구역의 하나로 편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군(基郡)이 그 사실을 잘 뒷받침해 준다. 사비 시대에 서산 지역은 고구려·신라와의 접경 지역으로 주요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중국 선진 문물 수입의 주요 거점이었다.
[한성 시대]
백제는 부여·고구려 출신의 유·이민과 마한 지역의 토착민들이 결합하여 한강 유역에서 건국하였다. 초기에는 마한의 소국에 불과했으나 북방의 선진 철기 문화와 기마술을 바탕으로 마한을 통합하기 시작했고, 기원후 3세기 무렵 아산만 일대의 목지국(目支國)을 병합하면서 태안반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三國志)』 한조(韓條)를 보면, 당시 서산 지역에는 치리국국(致利鞠國) 내지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이라는 소국 세력이 있었고, 백제 중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대로리 명지 고분과 기지리 고분군 등에서 출토된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와 철제환두도(鐵製環頭刀)는 당시 백제 중앙과 서산 지역이 교류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이처럼 일찍부터 서산 지역이 백제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서산 지역이 가진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서산 지역이 있는 태안반도 일원은 한강 유역에서 남해안 일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해상 교통로 상의 요지에 위치하였다. 아울러 만과 곶이 발달하여 해안선이 복잡하고, 해류와 조수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워 토착 세력이 아니고서는 수로를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백제는 서산 지역의 토착 세력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충청남도 서해안 일대, 더 나아가 남해안 일대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고 여겨진다.
2005년 서산시 음암면의 서산 부장리 고분군에서 총 13기의 분구묘가 조사되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유적에서는 금동관모, 금동신발 등을 비롯한 각종 금제 장신구와 환두대도, 철제초두, 중국제 자기편, 구슬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전 시기와는 달리 한성 양식 토기를 비롯하여 백제 중앙과 서산 지역 간의 정치적인 상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웅진 시대]
475년 한성 함락으로 백제는 웅진[현재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백제는 고구려의 외침과 급작스런 천도로 인한 대내외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나갔다. 서산 지역도 백제의 천도와 함께 자연스럽게 새로운 역할이 부가되었다. 해상을 통한 고구려의 군사 활동 방비를 위해 해안 지역에 부성산성(富城山城)을 비롯한 다수의 관방 유적이 축조되었다. 부성산성은 정상부에서 좌우로 가로림만의 바닷가를 조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해안을 방비하기 위해 조성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서산 지역은 백제의 한강 유역 상실로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새로운 거점으로 부상하였다. 한강 유역을 상실한 백제는 새로운 기항지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 시기의 교통로를 가장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서산 지역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태안반도 서북 지역으로부터 덕적도로 북상하여 경기만에서 기존의 항로를 이용하거나 덕적도에서 서해 공해상으로 진출한 후 서해를 횡단하는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산 지역의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점차 백제 중앙의 통제력도 강화되어 토착 세력의 입지는 점차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비 시대]
538년 백제는 다시 사비[지금의 충청남도 부여]로 천도하였다. 사비 천도는 동성왕(東城王)·무령왕·성왕(聖王)을 거쳐 중흥을 이루어낸 백제가 웅진 지역의 협소함을 극복하고 보다 넓고 수로 교통에 유리한 지역으로 이전한 것이었다.
사비 시대에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당항성을 거점으로 중국과 통교하면서 백제의 새로운 경쟁자로 부상하였다. 신라는 백제·고구려로부터 받는 군사적 압력을 대중국 외교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백제의 군사 행동이 개시되면 즉시 중국 측에 알려 백제를 압박하였다. 따라서 백제는 당항성과 남양만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의 대중국 교섭을 차단하기 위해 부심하였고, 대중국 항로의 확보도 필요하였다. 따라서 남양만의 대척점에 있는 태안반도 일원의 서산 지역이 계속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비 시대에는 서산 지역이 신라의 해양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사비 시대 서산 지역에는 당시 도읍지였던 사비 지역을 제외한 지역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과 서산 보원사지[사적 제316호]등의 불교 건축물이 조성되었다. 이는 서산 지역이 백제의 남천 이후 대중국 교섭의 창구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선도 지역이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군(基郡)과 그 속현 성대혜현(省大兮縣) 및 지육현(知六縣)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비 시대 서산 지역은 방·군·성제에 의한 행정 편제가 이루어졌고, 아울러 서산 지역에는 서방성(西方城)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