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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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之立 |
영어음역 | Yu Jirip |
이칭/별칭 | 입부(立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충신.
[가계]
본관은 서령[서산]. 자는 입부(立夫). 서산의 유력 성씨인 서령 유씨 유백순(柳伯淳)[?~1420]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진사 유방익(柳邦翼)이며, 형은 유경립(柳景立)이다.
[활동 사항]
유지립(柳之立)[1555~?]은 1575년에 사마시에 합격했고 1579년(선조 12) 25세에 생원 3등 54위로 입격하였다. 사마방목에 나타나는 서산 거주 인물 중 생원·진사 합격자는 모두 7명인데 그중 한 사람이며, 조선 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인물조에 기록되어 있다.
1582년(선조 15) 서산으로 부임했던 고경명(高敬命)은 지역 내 20세 이하의 특출한 자제 30여 명을 뽑아 특별히 교육하였는데, 이때 유지립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 유민수(柳敏遂), 『호산록(湖山錄)』을 편찬한 한여현(韓汝賢) 등 네 명을 동몽교사로 삼았다. 결국 이들이 1500년~1600년대 서산 지역 향촌 사회를 주도했던 주요 사족 가문의 인물들로 주목된다.
한편 유지립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광해군이 세자로서 공주로 피난오자 당시 서산 지역의 폐단을 상소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서산에 부임했던 군수 박승종(朴承宗)의 폐정을 알리기 위해 민폐를 적어 소장을 올렸는데 좌수 유모라는 자가 유지립이 올린 상소 중 성주와 관련된 내용이 있음을 태수에게 고하자, 유지립은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박승종은 민생 안정을 돌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업무를 향소에 맡겨 향소의 하리들이 위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들로부터 고통 받던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기까지 하였다.
유지립은 천성이 소탈하였고 평소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절개가 강한 인물로 1592년 9월에 선조가 용만(龍灣)[평안북도 의주시의 옛 별호]으로 파천한 후, 임금의 음식이나 의복이 모두 보잘 것 없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유지립이 직접 한경원(韓慶元), 청주의 한일제(韓日躋), 부여의 복성(卜誠) 등 3인을 선임하여 상소를 올렸으나, 행재소에 이르는 데 난관이 있었다고만 전해져 상세한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