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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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寬龍 |
영어음역 | Gim Gwanry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900년 - 김관룡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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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독립 만세 운동 |
몰년 시기/일시 | 1975년 - 김관룡 졸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동암리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암리 82 |
거주|이주지 | 동암리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암리 82 |
학교|수학지 | 해미공립보통학교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
활동지 | 해미장터 3·1 운동 만세 운동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327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관룡(金寬龍)[1900~1975]은 1919년 당시 해미면에 있던 해미공립보통학교의 졸업반 학생으로 평소에 일제 식민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19년 3월 24일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식 직전에 면사무소 서기인 이계성(李啓聖)으로부터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를 받았다. 김관룡은 졸업생을 위한 고별회에 참석하여 졸업생 이봉이(李鳳伊), 유한종(劉漢鍾), 최흥양(崔興良)과 재학생 장기남(張基南), 양태준(梁泰準), 이기신(李起信) 등에게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의하여 찬성을 받아냈다.
고별회가 끝난 뒤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해미읍성의 남문과 서문을 지나 읍내리 면사무소, 우시장까지 행진하면서 김관룡의 선창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주재소로 이동하던 시위대는 일제 경찰과 충돌하여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김관룡은 같은 해 4월 2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5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옥 후 독립운동을 계속할 뜻을 품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되어 법회 강연, 대담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