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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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奇自獻 |
영어음역 | Gi Jaheon |
이칭/별칭 | 사정(士靖),만전(晩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춘진 |
출생 시기/일시 | 1562년 - 기자헌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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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성균관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식년시 생원 2등 16위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0년 - 증광시 병과 12위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1년 - 예문관검열, 병조·이조좌랑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호조참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우의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좌의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14년 - 영의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17년 - 홍원으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620년 - 덕원부원군에 봉해짐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서산으로 중도부처됨 |
몰년 시기/일시 | 1624년 - 기자헌 졸 |
추모 시기/일시 | 1627년 - 복관 |
거주|이주지 | 서산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행주 |
대표 관직|경력 | 영의정 |
[정의]
조선 후기 서산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행주(幸州). 처음 이름은 기자정(奇自靖),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晩全). 증조할아버지는 기묘사화 때 죽은 응교(應敎) 기준(奇遵)이며, 할아버지는 한성부윤을 지낸 기대항(奇大恒)[1519~1564]이고, 아버지는 기응세(奇應世)[1539~1585]이다. 부인은 종실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의 딸이다. 아들은 기준격(奇俊格)과 기민격(奇敏格)이다. 기자헌이 서산에 중도부처된 것을 계기로 기민격이 지금의 서산시 팔봉면으로 들어와 살았다.
[활동 사항]
기자헌(奇自獻)[1562~1624]은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병조좌랑·이조좌랑을 거쳐,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호조참판으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선조 34)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죽은 최영경(崔永慶) 등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당시 옥사를 주도한 서인을 탄핵하여 실각시켰다. 그 뒤 세자시강원우부빈객(世子侍講院右副賓客), 공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604년(선조 37)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선조가 세자[광해군]를 폐하고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대신 세우려 하자 극력 반대하여 광해군의 즉위에 힘을 보탰다. 그 공으로 1614년(광해군 6) 영의정에 올랐다.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일자 부당함을 주장하다 삭탈관직되고 홍원(洪原), 길주(吉州)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풀려나 강릉에서 은거하였다. 1620년 광해군의 특지(特旨)로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김류(金鎏), 이귀(李貴) 등으로부터 인조반정에 가담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인조반정 직후 임금이 불렀지만 응하지 않아 1623년(인조 1) 서산으로 중도부처(中途付處)[벼슬아치에게 특정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되었다. 이후 서울로 압송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할 가능성이 있다 하여 옥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 처형되고, 일족도 몰살당했다.
[상훈과 추모]
1613년(광해군 5) 임해군(臨海君)[선조의 맏아들]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가 1623년(인조 1) 훈적에서 삭제되었다. 1627년(인조 5) 이원익(李元翼)·이귀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기자헌의 아들 기민격이 은거한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덕송리에는 기자헌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