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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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貞純王后生家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한다리길 3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왕기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8년 8월 30일 - 정순왕후생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68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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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정순왕후생가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
건립 시기/일시 | 1650년경 - 효종의 하사금으로 건립[추정] |
현 소재지 | 정순황후생가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한다리길 39[유계리 464] |
성격 | 전통 가옥|생가 |
양식 | 1고주 5량 홑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3칸[대문채]|5칸[안채]|5칸[사랑채]|2칸[광채] |
측면 칸수 | 1칸[대문채]|2칸[안채]|1칸[사랑채]|1칸[광채] |
소유자 | 김기흥 |
관리자 | 김기흥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있는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생가.
[개설]
정순왕후생가(貞純王后生家)는 조선 시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1745년(영조 21)에 태어난 집이다. 정순왕후가 태어나던 날 집 주변에 상서로운 기가 맴돌고 아름다운 새들이 집으로 날아들어 마을 주민들이 ‘장차 인물이 될 징조’라 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의 맏딸로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1692~1757]가 승하하자 1759년(영조 35)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위치]
서산시 해미면과 음암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유계리 국도 29호선에서 북동쪽으로 유계리 마을회관을 지나 약 400m쯤 가면 정순왕후생가가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 소심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농경지와 낮은 구릉이 펼쳐져 있는 평지 마을이다.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는 한다리마을이라고도 불리며, 경주 김씨(慶州金氏)의 집성촌이다.
[변천]
정순왕후생가는 정순왕후의 5대조이며 경주 김씨 학주공파의 시조인 김홍욱(金弘郁)[효종 때 승지·충청감사·황해도관찰사·예조참의 등을 지냄]이 효종에게 하사 받은 집이다. 김홍욱이 노부[김적(金積)]를 모시고 있음을 효종이 듣고 효심에 감동하여 하사하였다. 효종의 하사금으로 1650년경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형태]
큰 대로변 쪽으로 350년 된 느티나무와 솟을대문이 자리하고 있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대문 양쪽에 창고가 배치되어 있다. 대문채 중앙 1칸에만 높은 방추형 초석을 세웠다. 대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과 잘 정비된 화단이 나온다. 대문채와 사랑채는 마주하고 있다. 사랑채는 53㎡ 면적의 정면 5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장대석 외벌대 기단을 만들고 덤벙 주초에 사각기둥을 세웠다. 광, 부엌, 사랑방, 마루방이 배치되어 있고 사랑방과 마루방 남쪽으로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 동쪽에 가옥 뒤란으로 이어지는 쪽문이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 서쪽 익랑(翼廊)에 붙여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간(中門間)을 두었다. 중문간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 안채가 나오는데, 안채와 사랑채를 완벽한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이렇게 완벽한 ‘ㅁ’자형 평면은 충청남도 지방에서는 흔하지 않다. 이웃한 서산 김기현 가옥(瑞山金基顯家屋) 또한 안마당이 완벽한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안채는 132㎡ 면적의 1고주 5량가에 장대석 기단을 외벌대로 쌓고 덤벙 주초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다. 대청 전면 기둥의 높이가 3.36m로 전통 가옥에서는 보기 드물게 높은 기둥을 세워 안채의 지붕을 전체적으로 높게 만들었다. 지형상의 단 차는 없으나 안채의 지붕을 사랑채의 지붕보다 훨씬 높게 만든 것은 영남 지방 가옥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안채 가운데 3칸 통간의 큰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고, 동쪽 익랑에 커다란 부엌을 두고 서쪽 익랑에 마루방과 건넌방, 고방을 두었다.
대청에는 들어열개문을 설치하여 개폐가 자유롭도록 하였으며, 전면에 반 칸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 양 끝 단에 안방과 건넌방 문이 달려 있고 문 옆에 머름과 여닫이 띠살창을 설치하고 쪽마루를 달았다. 대청과 양쪽 방의 생김새가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엌이 큰 규모를 하고 있어 당시 살림살이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 준다. 안마당에 우물이 아직도 설치되어 있는데 단을 새로 쌓았다. 안마당 내부에 우물이 설치된 것은 지리적 특징 때문인데, 물이 많이 나오는 곳의 특징을 살려 우물을 설치한 것으로 사료된다.
후원과 안채, 사랑채를 자연석 기와 담장으로 둘렀으며, 지붕 형태는 전체적으로 맞배로 볼 수 있지만 사랑채는 우진각 지붕의 형태를, 안채는 팔작의 형태를 하고 있고, 안채의 익랑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사랑채 공간은 다른 반가(班家)에 비해 작은 편이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주로 생활하던 공간으로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 역할도 하는 곳이다. 조선 후기 왕후를 배출한 집안이라면 남자들의 활동이 활발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순왕후생가에서는 이러한 활동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사랑채가 다른 곳에 비해 작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원래 사랑채가 별도로 있었으나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전해진다. 가옥 서쪽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광채가 배치되어 있고, 담장과 이어진 협문(夾門)이 설치되어 있다. 서쪽의 협문과 마주하여 동쪽에 서산 김기현 가옥으로 이어지는 협문이 자리하고 있다.
[현황]
정순왕후생가는 정순왕후의 권력에 비해 건물채가 적고 마당이 넓다. 과거 여러 채의 건축물이 있었으나 소실되고 현재는 사랑채와 안채만 남아 있다. 마당 오른편에 작은댁인 서산 김기현 가옥으로 이어지는 협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문걸이는 서산 김기현 가옥 편으로 되어 있다. 독립운동가 김용환의 아들인 김기흥이 소유하고 있으며, 1988년 8월 3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정순왕후생가는 충청남도 지역 반가이나 가옥의 좌향을 일조권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배치한 점, 안채의 지붕을 의도적으로 높게 설치한 점과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두고 완벽한 ‘ㅁ’자 형태를 갖는 점 등으로 볼 때, 전형적인 충청 지방 반가의 모습으로 볼 수는 없다. 정순왕후라는 역사적 인물이 태어난 생가지이며, 독립운동가 김용환의 생가지로서 건축사적, 향토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