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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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墳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tomb |
이칭/별칭 | 무덤,분묘,고총고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방문식 |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 분포해 있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의 고대 무덤.
[개설]
고분은 무덤의 일종으로 고고학에서는 일정한 시기와 형식을 갖춘 매장 시설물을 말한다. 무덤은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위생 관념에서 발생한 문화적 소산으로 인류 출현 이후 흔하게 발견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지하에 시신을 매장하고 지상에 흙을 쌓았는지의 여부에 따라 묘(墓)와 분(墳)을 구분하였다. 일본에서는 반대로 시신을 지하에 매장하고 그 위에 흙을 쌓은 것을 묘라고 하였다.
무덤은 매장 관념이 발생한 이래 사회조직이 고도화되면서 기념물화(記念物化) 되었고 구조와 의례가 다양하게 나뉘었다. 이에 고고학에서는 고대 국가가 형성될 시기에 이르면 일정한 형식을 갖춘 지배층의 무덤을 따로 고총고분(高塚古墳)이라 이르는데, 이 시기를 고분이 정립된 때로 파악하고 있다.
[고분의 구조]
고분의 구조는 크게 매장 시설, 봉분(封墳), 묘역 시설로 나뉜다. 매장 시설은 시신을 두는 공간, 봉분은 매장 시설을 봉하고 외부에 나타내는 표지를 말한다. 묘역 시설은 매장 시설이 점유한 영역을 나타낸다. 이들은 다시 재질과 형태 구조에 따라 세분된다. 우리나라에서 선사시대의 무덤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등 고고학의 시대 연구 일환으로 다루고 있다. 고분은 고대국가 형성 이후인 삼국의 건국부터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불교식 화장법의 성행으로 고분 축조가 쇠퇴된 시기까지를 말한다.
[시흥의 고분]
시흥 지역의 고분도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때까지를 이른다. 시흥 지역은 거모동, 과림동, 광석동, 금이동, 논곡동, 매화동, 안현동, 포동 일대에서 삼국시대의 유물 산포지가 보고되었으며 산현동 일대에서 통일신라 때 유물 산포지가 보고되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고분이 발견된 사례는 보고된 바가 없으며 당시의 정세로 미루어 구조와 형태는 짐작할 수 있다. 삼국시대 시흥 지역은 백제와 관련이 깊으며 위례성과 미추홀의 중간 지역에 해당된다. 특히 지금의 시흥시 북부인 소래권이 조선시대까지 인천부에 속하였으므로 온조(溫祚) 집단보다는 비류(沸流) 집단과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고분은 도읍지의 위치에 따라 축조 방식이 변화해 왔다. 백제 건국에서 5세기 후반에 이르는 한성(漢城) 시기에는 서울 석촌동 고분군의 구덩무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연천 문호리 고분과 같은 돌무지무덤이 유행하였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웅진성(熊津城) 시기에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벽돌무덤, 6세기 초반부터 7세기 후반에 이르는 사비성(泗泌城) 시기에는 능산리 고분과 같은 돌방무덤과 화장 무덤이 유행하였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이후에도 충주 누암리 고분군의 돌방무덤, 여주 매룡리 고분군의 돌덧널무덤이 일정 기간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시흥 지역에서는 초기 철기시대 이후 통일신라 때까지 고분이 발견된 예는 없으나, 삼국의 중심지 이동에 따라 중앙의 무덤 양식에 영향을 받거나 토착 세력의 전통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