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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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英烈 |
이칭/별칭 | 열지(熱之),맹암(孟巖),양소(襄昭),의성군(義城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열지(熱之), 호는 맹암(孟巖), 시호는 양소(襄昭)이다.
[활동 사항]
김영렬(金英烈)[?~1404]은 1394년(태조 3)에 경기우도 수군첨절제사(京畿右道 水軍僉節制使)가 되고 1395년 왜선(倭船) 1척을 나포하여 포로 21인을 바치고 내구마 1필과 비단과 궁온(宮醞)을 하사받았다. 1396년 왜선(倭船) 2척을 추자도(楸子島)에서 잡고 중추원 부사(中樞院 副使) 겸 경기도 도절제사(京畿道 都節制使)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투항해온 왜구에 대한 처리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옹진(甕津)에 유배당하고, 삭탈 관직되어 수군(水軍)에 편입되었으나 다음해 풀려났다.
1401년(태종 1) 1월 15일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써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익대 좌명공신(翊戴 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같은 해 6월 24일 지의흥삼군부사(知義興三軍府事)로 있을 때 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 이무(李茂)의 집에 금법(禁法)을 범하고 분경(奔競)하였기 때문에, 헌사(憲司)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였다. 곧 복직되어 7월 8일 좌우도(左右道) 수군 도절제사(水軍 都節制使)로 있다가 풍해도(豊海道) 서북면(西北面)으로 가서 왜적을 방비하였다.
1402년(태종 2) 동북면 강원도 도안무사(東北面 江原道 都安撫使)가 되고, 같은 해 태조 이성계의 지지를 받은 조사의(趙思義)가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神德 王后)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를 잡아서 압송하였다. 1404년(태종 4) 삼도 수군 도지휘사(三道 水軍 都指揮使)가 되고 이어 참판 승추부사(參判 承樞府事)가 되었다. 그해 8월 왜선(倭船) 1척과 포로 6명을 생포하였다. 그해 죽자 의성군(義城君)으로 추봉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맹암집(孟巖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45년 김영렬을 제향하기 위해 의성 김씨 문중에서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왕신리에 신천 서원(新川 書院)을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