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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299
한자 歷史
영어의미역 History
분야 역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집필자 심현용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상북도 울진군의 역사.

[개설]

울진군은 경상북도 최동북단에 위치하는 군이다. 동쪽은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봉화군과 영양군, 남쪽은 영덕군, 북쪽은 강원도 삼척시와 접한다. 경상북도 23개 시·군 중에서 8번째로 면적이 크다. 지금의 울진군은 조선시대까지만 하여도 북쪽의 울진 지역과 남쪽의 평해 지역으로 구분되어 서로 다른 행정 체계로 되어 있었으나, 1914년 두 지역이 통합되어 지금과 같이 울진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또 강원도와 경상도의 접변 지역에 위치하여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해안 방어, 교통 및 해상의 항로 등 여러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역사적 변천을 겪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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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울진군의 연혁 변천

[선사시대]

울진 지역의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는 북면 주인리 석수동 유적이 확인되었다. 석수동 유적은 지표 조사에서 확인된 것으로 주먹도끼·긁개·밀개 등이 수습되었으며, 시기는 구석기시대 중기[B.C. 12만년~B.C. 4만5,000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울진 지역은 늦어도 구석기시대 중기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는 신석기시대 조기로 추정되는 죽변리 유적과 전기로 추정되는 후포리 유적 등으로 보아 신석기시대에 이미 사회적 관계가 성립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평해리 민무늬토기산포지, 월송리 민무늬토기산포지, 월송리 유물산포지 등 다수가 있다.

울진군 기성면 봉산리에 위치한 봉산리 유적은 여러 기의 주거지가 발굴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으며, 수산리 지석묘군·고목리 지석묘군 등 70여 기의 지석묘가 확인되고 곳곳에서 청동기시대의 돌도끼 등 석기들이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울진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가장 활발한 사회 분화가 발생한 것 같다.

[삼국시대]

울진 지역의 초기 국가 역사에 대해서는 그 기록이 전무하여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고고 자료로 유추해 보면, 지금의 죽변면 장산성 일대를 중심으로 하나의 소국(小國)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영남 지역에는 B.C. 1세기 초~B.C. 1세기 말 사이에 진한이 성립하였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울진 지역에는 ‘우중국(優中國)’ 또는 ‘우유국(優由國)’이라는 소국이 형성되어 진한 연맹체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울진 지역의 옛날 명칭이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우진야(于珍也)’로, 창녕진흥왕척경비[561]에는 ‘우추(于抽)’로 나오는데, 음운상 비슷하다. 이렇듯 초기국가시대 울진 지역은 경주 사로국 중심의 진한 연맹체에 편입되어 있다가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신라에 통합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원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이라고 하였다. 이후 울진지역은 고구려가 468년(장수왕 56)에 삼척 지방을 장악하고 481년에 미질부[지금의 흥해]까지 공격하던 시기에 잠시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505년(지증왕 6) 삼척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군주를 두었다. 신라가 5세기 말~6세기 초에 동해안의 빼앗긴 땅을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524년(법흥왕 11)에 건립된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되었다. 이 비는 울진 지역에서 어떤 중대한 일이 발생하자 신라에서 대군(大軍)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한 후 6부 회의를 열어 사태가 일어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관련자들을 벌하고 얼룩소를 죽여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라 지증왕은 주군제를 실시하여 주에는 군주, 군에는 당주, 성[촌]에는 도사(道使)를 파견하였다. 최초의 군주는 실직주[지금의 삼척]에 파견된 이사부(異斯夫)였다. 이때 울진 지역에도 도사가 파견되었다. 당시 울진 지역은 노인법(奴人法)의 적용을 받는 지역이었다.

울진봉평신라비에는 실지군주가 거벌모라도사와 실지도사를 통할하였던 것으로 나온다. 당시 주치(州治)가 505년(지증왕 6)에는 실직주로, 512년에는 하슬라주[지금의 강릉]로 이동되었으며, 524년 울진봉평신라비 단계에서는 다시 실직으로 이동되어 있다. 이는 당시 거벌모라로 불린 울진 지역은 실직주에 편입되어 있다가 하슬라로 주치가 이동되면서 하슬라주 군주의 통제를 받았으며, 울진봉평신라비 단계에서 다시 실직주 군주의 관할하에 놓이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진흥왕은 사대등으로 하여금 울진군[당시 우추]을 감찰하도록 하였다.

남쪽에 위치한 평해 지역에 관한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평해군은 원래 고구려의 근을어(斤乙於)였는데 고려시대에 평해군으로 고쳤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삼국사기』에는 평해 지역에 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685년(신문왕 5)에 영토를 9주(州)로 분할하였는데, 동해안 일대를 명주(溟州)로 편제하고 울진 지역을 거기에 소속시켰다. 명주는 북쪽으로 통천, 서쪽으로 안동시 임하와 청송, 남쪽으로 청하까지를 관할 영역으로 하였다. 이후 757년(경덕왕 16) 전국의 주군현 명칭을 개정할 때 울진 지역은 ‘우진야(현)’에서 ‘울진(군)’으로 개칭하고 영현으로는 ‘해곡현(海曲縣)’을 두고 그대로 명주의 관할하에 두었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왕위 계승에서 실패한 김주원은 명주로 낙향한 후 정부로부터 양양에서 평해에 이르는 일대를 식읍으로 받았다. 즉 신라 중앙정부는 786년(원성왕 2) 김주원명주군왕으로 삼고 동해안 일대를 식읍으로 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울진·평해 지역은 원성왕 대 이후 김주원 가문의 식읍으로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후 그의 후손 4대에 걸쳐 그러한 관계는 유지되었다.

특히 신라 말 김순식이 명주 장군을 칭하면서 그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므로 울진·평해 지역도 그 세력에 연결되었다. 김순식이 922년(태조 5)에 고려에 귀부하면서 고려의 영역이 되었다. 하지만 울진 지역의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한 것은 왕건이 930년 고창전투[지금의 안동]에서 후백제 군대를 격파하여 승리함으로써 주도권을 장악하였을 때다. 이렇게 울진 지역의 호족들이 고려의 고창 전투 승리 후 고려에 귀부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당시 명주와는 별도의 독자적인 호족 세력이 울진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 전국을 10도(道)로 나눌 때 오늘날 강원도의 대부분이 삭방도(朔方道)가 되었는데 울진 지역은 삭방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지방제도 개폐를 거쳐서 현종 때에 오도양계제(五道兩界制)로 정리되었다. 이때 강원도 지방은 대체로 태백산맥 동쪽 지역은 동계(東界)로, 서쪽 지역은 교주도(交州道)로 분리되었으며, 울진은 동계에 소속되어 명주의 관할을 받았다.

울진은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어 현령을 두게 되는데, 강등된 시기는 1018년(현종 9) 지방제도 개편 시로 추정된다. 울진현은 현령이란 외관이 파견되었지만 속현은 없었다. 고려 초부터 울릉도를 울진의 관할 행정구역으로 포괄하고 있었다. 1036년(정종 2)부터 동계(東界)로 불리며, 1047년(문종 1)에 동북면(東北面)으로 불리고, 1178년(명종 8)에는 강원도 지방은 대관령, 동쪽은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 서쪽은 춘주도(春州道)로 하였는데, 이후 춘주도가 동주도(東州道)로 되었다. 또 경상도 예주 영양군 소속인 수비부곡이 문종 대에 잠시 울진에 이속되었다가 다시 영양군에 복구시켰다.

평해 지역은 그동안 ‘근을어(斤乙於)’로 불리다가 고려 초에 ‘평해’로 개명된다. 평해는 1018년(현종 9) 지방제도 개편 시 예주방어사의 속현이 되었으며,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처음으로 파견된다. 1297년(충렬왕 23)에 지군사를 두면서 현이 군으로 승격된다. 즉 평해현은 1018년(현종 9)부터 1259년(고종 46)까지 예주의 속현으로 경상진안도에 소속되어 있어서 연해명주도에 소속된 울진현과 영속 관계를 달리하여 왔으나, 1259년 평해현이 (연해)명주도로 이관되면서 비로소 영속 관계를 같이하게 된다.

1263년(원종 4)에는 연해명주도가 강릉도(江陵道)로, 동주도가 교주도(交州道)로 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는 강릉도가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가 되었다가 동년 7월에는 동북면(東北面)이라 불렸으며 1357년에 다시 강릉도로, 1360년에 삭방강릉도로, 1366년에는 다시 강릉도로 되었다. 1388년(우왕 14)에는 영동과 영서를 합하여 교주강릉도로 칭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 강원도 지역은 여러 차례 대관령 동쪽과 서쪽으로 분리되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면서 삭방도·강릉도, 혹은 합하여 연해명주도·교주강릉도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는데, 이에 따라 그곳에 속한 울진의 연혁도 변경되었다.

울진·평해 지역은 동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잦은 국방상의 요새지로서 동해안의 방어 역할을 하고 있었고, 군사적 목적으로 성이 축조되었다. 예를 들면, 1200년(신종 2) 고현성(古縣城)이 축조되었으며, 1371년(공민왕 20) 고현성이 왜구에 의해 소실되자 울진현령 어세린과 평해군수 김을권이 각기 울진현성과 평해읍성을 쌓아 왜구를 막고 백성을 안주시켰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1395년(태조 4) 6월 13일부로 지방제도의 명칭을 개정하게 되었는데, 강원도로 개정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의 대대적 개편 시 울진현과 평해군은 강원도 삼척도호부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세종 대에 양계와 각도 연변의 군사적 요지를 상·중·하긴으로 구분할 때 하긴(下緊)이 되었다.

당시까지 울진현은 삼척도호부에 소속되었으나, 1466년(세조 12) 진관체제의 확립에 따라 강릉부진관에 이관되었고, 울진포에 수군만호가 배치되었다. 평해군은 지방관에 지군사를 두었으나, 1466년(세조 12)에 군수로 승격되었다. 또 그 해에 진관체제의 확립에 따라 삼척도호부에서 강릉부진관으로 이관되며, 월송포에 수군만호가 배치된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울진·평해 지역에 수군을 전담하는 만호를 별도로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이 지역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395년부터 강원도의 명칭도 271년간 변함없이 계속되었으나, 1666년(현종 7) 이후 1895년까지 10여 차례나 변경된다. 즉 1666년(현종 7)에 강원도에서 원양도(原襄道)로, 1675년(숙종 1)에 강원도로, 1683년(숙종 9)에 강양도(江襄道)로 하였으나 1688년(숙종 14)에 강춘도(江春道)로 하였다가 1693년(숙종 19)에 다시 강원도로, 1729년(영조 5)에 강춘도로 하였다가 1738년(영조 14)에 다시 강원도로, 1782년(정조 6)에 원춘도(原春道)로 하였다가 1791년(정조 15)에 다시 강원도로 변경되었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칙령 제98호로 조선팔도제도(朝鮮八道制度)가 23부제(府制)로 시행되면서 강원도의 명칭은 일시 중지되고 춘천을 중심으로 한 영서 지역에는 춘천부(春川府)가 설치되고 강릉을 중심으로 한 영동 지역에는 강릉부(江陵府)가 설치되어 2개의 부로 분리되었다. 당시 읍격을 일률적으로 모두 군으로 하였기 때문에 울진현도 ‘울진군’으로 변경되어 읍격이 높아졌다. 이때 울진군과 평해군은 강릉부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1년 후인 1896년(고종 33)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13도제(道制)가 실시됨에 따라 강릉부와 춘천부가 합쳐져 강원도로 복칭되어 울진군과 평해군은 강원도에 속하게 되었다. 또 1909년 6월 25일 법률 제20호 「지분 구역과 명칭 변경에 관한 건」에 따라 면과 리가 결정되었다. 울진군에 속한 행정구역은 하군면·상군면·근북면·달북면·근남면·원남면·서면 등 7개 면이었으며, 이들은 현재의 울진읍·죽변면·북면·근남면·매화면·금강송면 등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평해군에 속한 행정구역은 상리면·북하리면·남하리면·남면·근북면·달북면·근서면·달서면의 8개 면이었으며, 이들 행정구역은 지금의 평해읍·온정면·기성면·후포면에 해당된다.

울진·평해 지역은 물고기와 소금이 많이 산출되었는데, 경상도 북부와 접경하여 농산물이 풍부한 영해부와 교역이 활발하였다. 울릉도는 1882년 울진현 관할에서 평해군으로 그 소속이 변경되었으며, 1885년 6월부터는 월송만호가 울릉도 도장(島長)을 겸임하게 된다. 1900년 10월 25일 울도군(鬱島郡)이 되어 강원도 27개 군현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는 울진 지역이 현재의 모습으로 행정구역과 체제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평해군과 울진군은 함께 강원도에 속해 있기는 하였지만, 두 개의 지역으로 분리되어 행정체제를 이루어 오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1913년 12월 29일 칙령 제111호로 다시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였다.

부·군제는 1914년 3월 1일부터, 면제는 1914년 4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평해군과 울진군이 통합되어 지금의 ‘울진군’이라는 하나의 행정 단위 체제가 되었다. 즉 1914년 부·군·면 폐합에 따라 7개 면의 울진군과 그 남쪽에 있던 8개 면의 평해군이 하나의 군으로 통합되고 군명을 ‘울진군’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현재와 유사한 규모로 되고 행정구역도 현재와 비슷한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울진 지역에서도 활발한 의병 항쟁이 일어났는데, 1896년 전기 의병을 거쳐 중·후기 의병 때까지 민용호·신돌석·성익현·정경태 의진(義陣) 등이 이곳에서 의병 항쟁을 펼쳤다. 의진은 일본이나 군아·경무소·우편소 등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많은 울진 출신자들이 참여하였다. 특히 신돌석 의진은 당시 일제의 전초 기지로 육성되고 있던 이 지역을 여러 차례 공격하여 일제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3·1운동이 1919년 4월에 매화면 매화리북면 부구리에서 일어났다. 울진 지역의 3·1운동은 서울의 경신학교에 수업 차 간 장식(張植)이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윤병관(尹炳寬)에게 비밀리에 전달하면서 시작되었다. 매화리의 만세 운동은 매화리금매리 출신의 청년들과 고목리 전병겸과 윤병관 등이 주도하였는데, 4월 10일 남수산에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며, 다음날 오후 3시경 매화장터에서 많은 군중들과 합세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부구리흥부장터에서도 4월 13일 오후 1시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1930년대에는 울진청년회, 신간회 울진지회, 울진공작당, 울진적색농민조합운동과 비밀결사 창유계(暢幽契) 등을 통하여 일제와 항쟁하였다. 울진청년회는 1919년 8월 조직되어 연극과 강연회를 통해 지역 청년들에게 분기·각성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1922년 울진강습소를 설치·운영하였다. 또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형평운동 등에 관여하였다.

특히 울진청년회는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 운동의 노선 전환으로 인해 신간회 울진지회울진공작당과 울진적색농민조합 결성으로 이어졌다. 신간회 울진지회는 1927년 10월에 조직되어 사회 운동과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지역의 명망가와 연대하여 활동하였다. 또 1929년 초에는 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협의만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에 들어와 신간회 운동이 점차 축소되면서 1931년에 해소되었는데, 이때 신간회 울진지회도 민족협동 전선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신간회 울진지회가 해체된 후 울진 지역에서는 울진공작당과 울진적색농민조합이 조직되었다. 울진공작당은 울진청년동맹을 중심으로 활동한 인물들이 주도하였다. 이 조직은 야학회를 설립하여 동지를 획득할 것을 운동 방침으로 정하고 지구 책임을 결정하고 극동공산주의자동맹으로 명칭을 고치는 등 활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로 자진 해체되기에 이른다. 울진적색농민조합은 다른 지역 적색농민조합과 마찬가지로 농민의 일상 이익 옹호를 기본 목표로 하고 일제 타도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고, 독서회 조직과 야학을 통한 의식 교양 및 동지 획득을 위해 활동하였다.

[현대]

8·15광복 이후 울진군은 관내의 행정구역이 변동 없이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1953년 1월 19일 평해면에 후포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53년 2월 13일에 울진면에 죽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이후 울진군은 행정구역상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즉 1963년 1월 1일에 강원도 관할하에 있던 울진군이 경상북도 관할로 넘어오게 되면서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이 된 것이다. 이때 온정면 본신리는 영양군 수비면에 편입된다.

이렇게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그 소속을 옮기게 된 배경에는 당시 강원도의 도청소재지가 춘천이어서 거리가 멀다는 점과 생활 영역이 강원도보다는 영남 지역인 경상북도와 비슷하다는 점이 참작되었기 때문으로 보이며, 울진의 북쪽 지역이 산세가 험하여 강원도와 경계가 될 수 있는 지형도 하나의 요인이 된 것 같다.

1967년 5월 28일 북면에 하당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에 울진면이 울진읍으로, 1년 후인 1980년 12월 1일에 평해면이 평해읍으로 승격되면서, 울진군은 약 2년 사이에 8면에서 2읍 6면의 행정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1983년 2월 15일에는 서면[현 금강송면] 전곡리 일부[승부역 일대]가 봉화군 석포면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은 현재와 같은 행정구역이 완비된 시기이다. 1986년 4월 1일에는 울진읍 죽변출장소가 죽변면으로, 평해읍 후포출장소가 후포면으로 각각 승격되면서 비로소 지금과 같은 2읍[울진읍, 평해읍]·8면[근남면, 서면[현 금강송면], 원남면[현 매화면], 기성면, 북면, 죽변면, 온정면, 후포면]·1출장소[북면 하당출장소]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1994년 12월 26일에 「시·군 자치구의 관할 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으로 서면[현 금강송면] 왕피리 일부[갈전]가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로 편입되어, 이후 현재의 울진군역을 이루어 지금까지 오고 있다.

이 같은 행정구역의 변천을 통해 오늘에 이른 울진군은 각 읍·면별 행정구역의 현황을 살펴보면, 전체 총 법정리는 80개, 행정리는 196개이며, 반의 수는 847개, 자연 부락은 398개소이다. 법정리가 가장 많은 곳은 북면, 울진읍, 기성면, 온정면 순이며, 가장 적은 곳은 금강송면이다. 행정리 역시 북면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기성면·울진읍·온정면 순으로 나타나며, 가장 적은 곳은 후포면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08 행정지명 현행화 서면에서 금강송면으로 변경 사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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