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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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邑南里鎭火峯址 |
영어의미역 | Site of Peak of Putting Out a Fire in Eumnam-r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 산68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희돈 |
성격 | 진화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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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조선시대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 산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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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 남산에 있는 조선시대 진화시설 터.
읍남리 남산 봉우리에는 옛부터 이중의 토병(土甁)을 묻어 두고서 넓적한 뚜껑돌로 덮어 놓은 곳이 있다. 이 봉우리를 흔히 진화봉(鎭火峯)이라 한다. 진화봉은 울진 근교에 산불이 자주 발생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라고 전한다.
읍남리 진화봉이 설치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894년(고종 31)까지는 매년 10월에 현령(縣令)이 날을 정하여 엽전삼전(葉錢三錢)으로 염수(鹽水) 한 병을 사서 토병 속에 넣으면 울진의 화재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하여 이러한 행사가 연중 행사로 시행되어왔다고 한다. 이는 진화봉이 당시 관아의 정오방(正午方)에 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읍남리 진화봉은 읍남리 오계골 건너 마을 서쪽의 구릉 정상에 위치한다. 구릉에서는 울진읍 내가 한 눈에 조망된다. 토병은 해발 100m 정도의 산 정상 지표 아래 약 l00m 정도에 얕게 묻혀 있었다.
진화 시설은 없어졌으나 그 병은 남아 있다고 하여 1999년 울진소방서 서장인 최동일이 땅 속에 묻힌 이중으로 된 토병인 초병을 발견하였다. 초병은 밑이 넓고 둥글며 목이 좁은 회갈색으로 크기는 직경 22㎝, 높이 25㎝ 정도이며, 목 위쪽은 이미 훼손된 상태였다. 지름 35㎝, 높이 30㎝ 정도의 약간 큰 항아리에 담긴 이중의 형태로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 스티로폼으로 뚜껑을 대신하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어 흔적을 찾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진화 시설로는 특이한 예다.
옛부터 진화봉의 위치에 대해 “관아의 정오방에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다. 그 위치를 살펴보면 지금의 고성리 고산성 정상이 정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당시 관아는 고산성에 위치하고 있었고, 진화봉은 고산성에 관아가 있을 당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 이전까지는 행하였다”는 기록에 의하면 고산성이 축조된 후 어느 시기부터 시작하여 군(郡)으로 승격된 1895년(고종 32)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1895년 이전까지 울진현령이 해마다 울진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연중 행사를 시행해왔다는 설화로 미루어 보아 민가 단위, 마을 단위를 넘어 관청에서 주도하여 이 행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상정해볼 수 있다. 이는 비보압승(裨補壓勝)의 주물(呪物)로 풍수 사상에서 출발하여 음양오행의 개념에 따라 민간 신앙화된 것으로 수화상극(水火相剋)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