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1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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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軸遺蹟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 for An Chuk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인표 |
성격 |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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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비좌와 이수를 갖춘 석비 |
건립시기/일시 | 1991년 10월 |
관련인물 | 안축 |
재질 | 화강암 |
높이 | 257㎝ |
너비 | 68㎝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
소유자 | 순흥안씨 종중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는 고려 후기의 문신 안축의 행적을 기리는 비.
[개설]
안축 유적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인 안축이 경상북도 울진군을 배경으로 많은 문학작품을 남긴 것을 기념하여 1991년 10월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건립한 유적비이다. 안축은 순흥(順興)을 본관으로 하며,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이다. 충혜왕(忠惠王) 때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되자 울진을 지나면서 많은 글을 썼고, 충군애민의 뜻이 담긴 문집 『관동와주(關東瓦注)』를 남겼다. 대표 작품으로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근재집』이 있다.
[건립경위]
고려 충렬왕 때 안축이 울진군을 여러 차례 순찰하면서 남긴 취운정(翠雲亭) 기문 및 월송정(越松亭)의 아름다움을 읊은 문학 작품 등 남은 유적을 기리고 보존하기 위하여 순흥안씨 양도공파 문중에서 1991년 10월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월송정 옆에 비석을 건립하였다.
[형태]
비신의 앞면에는 화강암으로 제작한 기단과 비좌,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2단의 기단 위에 비좌를 두고 비신을 고정시켰으며, 이수에는 용을 부조하였다. 기단은 높이 50㎝, 폭 35㎝이고, 비석의 높이는 비신 257㎝, 너비 68㎝이다.
[금석문]
비신의 전면에는 ‘고려삼중대광도첨의찬성사흥령부원군근재선생문정공부군유적비서(高麗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興寧府院君 謹齋先生 文貞公府君遺蹟碑序)’이라고 음각하였고, 비신에는 국한문 혼용의 비문과 명이 있다. 비문은 후손인 안성중(安誠中)이 짓고, 글씨는 안동준(安東濬)이 썼다. 안성중이 지은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680년 전 서기 1312년(충선왕 4) 근재 선조께서 선사(仙槎)와 기성(箕城) 등 여러 고을을 순찰하여 공이 있는 자를 올려주며 공 없는 자를 내쫓으셨다. 그 후 20년 1331년(충혜왕 1)에 세 번이나 이곳에 오셔서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을 살피고 관리들을 규찰하여 현리(賢吏)를 표창하고 왕명을 받아 머물면서 취운정(翠雲亭) 기문을 짓고 또 월송정(越松亭)을 읊으셨으니 유적이 없어지지 않았다.
기성종중(箕城宗中)의 용균(鎔均)씨와 흥렬(興烈)씨 등 여러 종원들이 일찍이 동준(東濬) 종회장님께 청하여 비를 세워 이러한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그 선조님을 경모하는 정성이었다. 그로 인하여 회장님이 글로써 성중(誠中)에게 비문을 짓도록 책임을 지우니 이 또한 선조님을 경모하는 일이라 어찌 감히 사양하고 피할 수 있으리요.
참람(僭濫)함을 잊어버리고 삼가 지어 올리나이다. 삼가 안찰(按察)해 보면 부군(府君)의 휘(諱)는 축(軸), 자는 당지(當之)이니 1282년(충렬왕 8)에 현재 순흥인 흥녕현(興寧縣) 고향집에서 태어나시고 겨우 약관 20세에 연달아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1324년(충숙왕 11)에 북경에 가서 원나라 대과에도 급제하셨다.
이보다 먼저 원나라 세조(世祖)인 홀필열한(忽必烈汗)이 고비사막의 북쪽인 외몽고에서 일어나 유럽과 아시아 양 대륙을 통합하고 북경(北京)에 도읍을 정하여 중국의 문물을 바꾸지 않고 세계를 호령하게 되었다. 후일 원나라 제3대 황제인 무종(武宗) 해산(海山)이 등극하여 유교를 숭상하며 도의를 중히 여기고 시호(諡號)를 추증하여 공자(孔子)라 하였다.
제도(制度)하여 이르기를 먼저 공자를 성인이라 함은 공자가 아니면 밝음이 없었을 것이요 다음 공자(孔子)를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공자가 아니면 법도가 없었을 것이니, 요임금과 순임금의 뜻을 서술하고 문왕과 무왕을 밝히 드러내시니 백왕(百王)의 모범이요 만세에 사표(師表)가 되나니 가히 대성지성(大成至聖)의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앙하였느니라.
아! 부자간의 친애(親愛)와 군신간의 의리는 영원히 지켜야 할 성인의 가르침이요, 천지의 광대함도 일월의 광명으로도 계곡물이 다하도록 오묘하고 이치에 맞게 잘한 명언(名言)이요, 오히려 높이 신성시하여 우리 원나라를 상서롭게 하였다 하니 이와 같이 정대(正大)하게 추앙하여 존경함은 먼저 군주들이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중국과 오랑캐들이 서로 호응하여 나라가 내왕(來往)한 지 오래 되었다.
이러함으로 부군(府君)이 즐겁게 원나라 과거에 응시하여 제삼갑(第三甲)인 칠인(七人)의 우두머리로 급제하셨으니 곧 이것은 천하의 장원이라 할 수 있다. 처음 받은 관직은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요. 다시 크게 쓰이지 아니하니 만약 아형(阿衡)이나 총재를 맡겨 준다면 능히 임무를 다할 수 있었고 가히 원나라로 하여금 예의 문명의 다스림을 이룰 수 있게 하고 다시 문왕 무왕이 나라를 평안히 하여 감옥을 텅 비게 한 세상을 만들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 애석하도다. 원나라 임금과 재상들이 어진이로 하여금 지혜와 재주를 능히 발휘할 수 있는 소임을 주지 아니하고 호족(胡族)과 한족(漢族)의 차별이 심하여 높은 구상을 가지고 원나라를 다스리는 큰 도량을 펴지 못했도다.
부군이 고려로 돌아와 성균악정(成均樂正)이 되었으며 얼마 후 원나라 개주수(蓋州守)가 부군의 큰 그릇됨을 흠모하여 사람을 보내어 예를 다하여 초청하였으나 우리 임금[충숙왕]이 바야흐로 중용하고 있었으므로 가서 원나라의 소임을 맡을 수 없었으며 또 개주수도 같이 일할 가망이 없음을 알고 있어 가시지 아니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올랐는데 1329년(충숙왕 16) 5월에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의 명을 받으니 해변의 여러 고을이 정치는 가혹하고 백성은 고달픈지라 밤에 편히 주무시지 못하고 시(詩)에 이르기를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어 구하기 어려움을 알고 있으며 나라의 병폐(病弊)를 생각하니 놀랄 지경이라 근심에 잠겨 베개머리에 잠 못 이루며 산속에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깊은 밤중이더라.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조정의 임금 곁에 있을 때는 그 백성들이 걱정되고 먼 시골에 있으면 그 임금이 걱정된다고 하였으니 나아가도 걱정, 물러나도 걱정, 그러면 언제 즐거움이 있으려나. 그가 힘주어 말하기를 천하의 걱정을 먼저 걱정하고 다음으로 천하의 즐거움을 즐거워한다고 하였다.
부군이 원조(元朝)에 계실 때 원나라에 왕의 억울함을 호소하사 잠시라도 걱정하지 않음이 없었고 멀리 바닷가[고려]에 계실 때도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면서 근심에 잠겨 잠들기 어려우니 나아가나 물러가나 모두 걱정이었다. 원나라와의 인연이 되어 원나라와 같이 즐거움을 누린 이후 즐거움을 쫓았으나 그때가 언제가 될까?
산간 벽지 마을이 쓸쓸하고 황폐한 땅에 곡물이 자라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걱정이다. 원나라에 바칠 인삼의 물량이 너무 많아 백성들이 인삼을 캐느라고 옷은 다 헐어 없어지고 농사 짓는 시기마저 잃어버려 춥고 배고픔이 번갈아 찾아오니 이 또한 걱정이요. 소금 굽는 백성들의 얼굴과 모발은 그을려 검게 타서 고달프고 배고픔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이 또한 걱정이다.
걱정이 쌓이고 쌓여 먼저 백성들과 더불어 왕철(往哲)들의 걱정이 한 수레바퀴처럼 일치하였으니 대인과 군자들의 마음 쓰임과 행하는 일이 백성과 나라를 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저 금강산, 총석정, 삼일포, 낙산사, 경포대, 한송정, 죽서루, 월송정, 망양정 등 사람의 이목을 끄는 것이 천태만상이며 탐관오리들이 놀고 마시며 연회를 일과로 하여 취하고 놀면서 정사는 버리고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죽였으나 도도한 부군의 맑고 깨끗한 뜻은 후한(後漢)의 범방(范滂)이 남비등거한 것과 같으니 풍문을 듣고 고개를 움츠리고 숙이며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는 자가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재상이 근재(謹齋) 선생 문집인 『관동와주집(關東瓦注集)』 서문에서 말하기를 감격하고 분개하여 지은 작품이라고 했으며 관동 지방 풍속의 이해 득실과 백성들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나눈 시가 열에 아홉이나 된다고 하였으니 가히 부군의 마음을 진실로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역시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크게 보익함이 있었고 백세 후에도 경계하는 교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취운정과 월송정의 두 큰 기행은 생민들의 오랜 고통을 다시 와서 어루만져 주었고 쓰고 읊으며 즐거움을 바랐으나 부군의 즐거움과 근심을 세상이 알지 못했으며 불초한 후손도 어찌 감히 알 수 있으리오. 부군이 관동의 9군(郡)을 위무함에 수레와 말발굽이 서로 이었지만 일찍이 제자(題字)하나 새기지 않은 것을 어째서일까.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어진 자는 정의(正誼)를 다스리며 이(利)를 도모하지 아니하고 도를 밝히되 그 공은 계산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저 진시황은 추역산에 올라가 비를 세워 공덕을 칭송하고 나아가 태산에 이르러 송덕비를 세웠다. 신라의 사선(四仙)인 영랑(永郞), 안상(安祥), 술랑(述郞), 난랑(鸞郞) 등이 각처에 제목을 붙여 글을 새겼으니 이는 모두 공을 계산하고 이를 도모하여 스스로 이름을 구한 사적 부류요 인자(仁者)가 하는 일이 못되니 부군은 이를 취하지 아니했다.
부군의 시를 아래와 같이 삼가 써 올리나이다.
인간만사 간곳없고 동해바다 그대론데(事去人非水自東)
천금 같은 씨앗남아 정자솔이 되었구나(千金遺種在松亭 )
겨우살이 다정하여 서로 엉켜 풀지 않고(女蘿情合膠難解
어린대는 친근하여 절구찧듯 모여 났네(弟竹心親粟可舂)
어찌하여 화랑들은 절경 속에 학을 삶았나(有低仙郞同煮鶴)
아서라 나무꾼은 멋없는 짓 배우지 말라(莫令樵父學屠龍)
머리카락 반백 되어 예온 곳 다시 오니(二毛重到曾遊地)
푸르고 푸르던 옛날 모습 부럽구나(却羨蒼蒼昔日容)
부군이 돌아가신 후 643년, 서기 1991년 10월 삼가 세움.
[현황]
순흥안씨 양도공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어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의의와 평가]
안축 유적비는 고려 후기 대표적인 문인 중 한 사람인 안축의 울진군에서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개인과 관련된 기록이 부족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안축에 대한 연구 자료를 제공하고, 나아가 울진군의 빼어난 자연 풍광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시켜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