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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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龍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민욱 |
활동 시기/일시 | 1408년 - 최용화 좌수군조전첨절제사에 임명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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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12년 7월 - 최용화 응양위 우군일번절제사에 임명됨 |
몰년 시기/일시 | 1422년 7월 15일 - 최용화 사망 |
묘소|단소 | 최용화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송포리 |
묘재 | 송호재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송포리 |
성격 | 무인 |
성별 | 남 |
본관 | 영천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무인.
[개설]
영천 최씨(永川 崔氏)는 진한(辰韓) 사량부(沙梁部)의 대인(大人)이다. 고려 의종(毅宗)부터 명종(明宗) 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연산군(燃山君)[연산은 지금의 영천]에 봉해진 최한(崔漢)을 시조로 하고 있다.
[가계]
최용화(崔龍和)의 본관은 영천. 고조는 4세(世) 봉익대부(奉翊大夫) 전호위상호군(典護衛上護軍) 최승주(崔承澍)이며, 증조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좌우위보승랑(左右衛保勝郞) 최윤기(崔允琪), 조부는 봉정대부(奉政大夫) 사온령동정(司溫令同正) 최윤(崔倫)이다.
부친은 경상감사(慶尙監査) 최안인(崔安仁)이며,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경주 최씨(慶州 崔氏)로 영동정(令同正) 최중유(崔仲儒)의 딸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경주 김씨(慶州 金氏)로 이조판서(吏曹判書) 김을초(金乙軺)의 딸이며,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최억년(崔億年), 사위는 사직(司直) 홍신(洪信), 홍계무(洪季武), 조흥종(趙興宗)이다.
[활동 사항]
최용화는 1408년(태종 8) 5월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를 나누어 왜적을 막게 할 때 좌수군조전첨절제사(左水軍助戰僉節制使)로 임용되었다.
동년 11월에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겸하였고, 1412년(태종 12) 7월 응양위(鷹揚衛) 우군일번절제사(右軍一蕃節制使)가 되었다.
1415년(태종 15) 1월 사헌부에서 공홍주도수군도절제사(公洪州道水軍都節制使)로서 병선과 군기를 수선하지 않았음을 논하여 부처(付處)하자,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422년(세종 4) 7월 15일 영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
최용화의 묘소는 영천시 북안면(北安面) 송포리(松浦里) 저현(楮峴)에 있으며, 문소(聞韶) 김황(金榥)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묘소 아래 묘재인 송호재(松湖齋)가 남아 있다. 유방선(柳方善)이 만시(輓詩)를 통해 “30에 단(壇)에 올라 태평을 도우셨고, 만년에 전사(田舍)에서 여생을 즐겼네. 민심은 오래되니 왕안석(王安石)을 생각하였고, 하늘의 뜻은 그렇게 하여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빼앗았네”라며 공의 죽음을 애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