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84
한자 蔡基中
영어공식명칭 Chae Gi-jung
이칭/별칭 극오(極五),소몽(素夢),채기중(蔡基仲)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채기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채기중 대한광복단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채기중 대한광복회 결성
몰년 시기/일시 1921년연표보기 - 채기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채기중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채기중 출생지 -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거주|이주지 채기중 이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활동지 채기중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활동지 채기중 활동지 - 경상북도 구미시
활동지 채기중 활동지 - 전라남도 목포시
묘소 채기중 묘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광복단 창설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채기중(蔡基中)[1873~1921]은 1913년 대한광복단과 1915년 대한광복회의 결성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가계]

채기중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이며, 채기중(蔡基仲)이라고도 한다. 상주시 이안면에서 아버지 채헌락(蔡獻洛)과 어머니 곡부공씨(曲阜孔氏) 사이 5남으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채기중은 1913년 풍기군에서 대한광복단[풍기광복단]이라는 비밀결사 조직 결성을 주도하였다. 대한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 간의 유기적 결합을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 상업망과 명망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대동상점(大東商店)이 대표적 사례이다. 대한광복단은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만주지방과의 연계를 주요 활동 범위로 하였다. 채기중은 강병수(姜炳洙)와 함께 자금 탈취를 계획하여 강원도 영월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중석광에 광부로 위장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지주와 부호를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추진하였다.

채기중이 이끄는 대한광복단은 1915년 대구의 달성공원에서 박상진(朴尙鎭)[1884~1921] 그룹과 통합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으며, 채기중은 경상도지부장을 맡았다. 대한광복회는 독립을 위해 중국 만주에 군사사관학교를 세우기로 계획했다. 이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력 기반이 마련되면, 일제와 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이었다. 이에 채기중은 전라도 출신 이병호(李秉昊)[1888~1955]와 충청도 예산 출신 김한종(金漢鍾)[1883~1921]을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리고 경상북도의 자산가 상황 조사에 착수하였다. 조사에는 자산가의 주소, 이름, 재산액 등을 항목으로 넣었다. 1915년 음력 7월 무렵 자산가 상황 조사를 박상진에게 전달하고, 박상진은 다시 우재룡(禹在龍)[1884~1955]에게 전달하였다. 우재룡은 조사서를 기초로 해서 국내 자산가들에게 포고문을 발송하였다.

채기중은 1917년 8월 자신의 집과 경성부 인사동 어재하(魚在夏)의 집에서 박상진·김한종·장두한·김동호(金東鎬)[1919~1982]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금에 참여하지 않는 부호들을 친일적 부호로 규정하고, 직접 처단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때 채기중은 경상북도를 맡았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칠곡의 대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채기중은 1917년 9월 대한광복회 단원들과 권총 3정을 휴대하고 칠곡으로 떠났다. 채기중은 왜관 약목시장의 주막에서 “오직 광복은 천인시부(天人是符)라. 성차대죄(聲此大罪)하여 계아동포(戒我同胞)라. 성계인 광복회(聲戒人光復會)”라는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채기중은 장승원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손님으로 위장해 장승원의 집에 하루를 머물렀다. 1917년 9월 26일 채기중 일행은 저녁 8시경 장승원 집에 도착하였다. 채기중과 강순필(姜順必)[1884~1921]은 각자 휴대한 권총으로 장승원을 향해 총을 발사하였다. 장승원은 후두돌기부와 왼쪽 무릎 상부에 총상을 입구 곧바로 쓰러졌다. 이어 이들은 포고문을 가옥에 붙이고, 유창순(庾昌淳)[1876~1927]은 석유가 든 맥주병으로 장승원의 집을 불태우려 했다. 그러나 유창순은 자신이 들고 있던 병이 깨어질 때 손가락에 상처를 입어 불을 지피지 못했다. 채기중 일행은 그렇게 장승원을 쓰러뜨린 뒤 도주하였다. 그 뒤 장승원은 대구 자혜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1917년 음력 9월 28일에 사망하였다.

채기중은 장승원 암살 뒤에도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계속해 나갔다. 채기중은 상주의 조용필(趙鏞弼)[1867~1946]을 만나 포고문의 내용을 자문받고, 예천 지보면의 윤창하(尹昌夏)[1884~1964]를 동지로 확보하였다. 이후 경상북도 각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 활동을 벌였다. 채기중은 1918년 음력 5월 무렵 서울에서 전라남도 보성 출신의 이병호를 만난 뒤, 호남과 충청 지역으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그 대상은 호남의 목포·이리·정읍·보성 등과 충청의 대전·괴산 등지의 부호들이었다. 채기중대한광복단에서 출발하여 대한광복회를 통해 독립운동의 범위를 경북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대해 나갔다.

하지만 대한광복회가 일제 관헌에 의해 발각되었고, 채기중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해 전남 목포에 숨어들었다가 체포되었다. 1918년 10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 제령위반 혐의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1919년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1920년 3월 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기각 판결을 받았다. 1921년 8월 12일 사형이 집행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묘소]

채기중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채기중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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