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594
한자 越妓瓊春殉節碑
이칭/별칭 월기경춘순절지처비,경춘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금강공원길 136[영흥리 산3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미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95년연표보기 - 월기경춘순절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757년연표보기 - 경춘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772년연표보기 - 경춘 사망
현 소재지 월기경춘순절비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금강공원길 136[영흥리 산38]지도보기
성격 비석
관련 인물 경춘
크기(높이, 너비, 두께) 109㎝[높이]|47㎝[너비]|14.5㎝[두께]

[정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낙화암 위에 있는 관기 경춘의 절개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개설]

영월부 관기 경춘[1757~1772]이 낙화암에서 투신하여 절의를 지킨 것을 기려 열녀 풍속을 권장하기 위하여 1795년(정조 19) 강원도순찰사 이병정(李秉鼎)의 지시로 월기경춘순절비를 건립하였다. 경춘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영월부 관기가 되어 어린 동생을 부양하였다. 영월로 부임한 이(李) 시랑과 각별한 정을 나누고 수절하고자 하였으나 관기 신분으로 신임 영월부사의 수청을 여러 번 거절하는 동안 형벌을 당하였으며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1772년 10월 낙화암에서 투신하여 16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세간에서 보통 월기경춘순절비라고 부르는 비의 공식 명칭은 ‘월기경춘순절지처비(越妓瓊春殉節之處碑)’이다.

[건립 경위]

강원도순찰사 이병정이 1795년 강원도 절행부를 살피던 중 영월을 지나다 경춘의 이야기를 듣고 열녀 풍속을 권장하기 위하여 경춘이 자결한 곳에 비석을 세워 표지를 남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병정은 봉급을 내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으며 전말을 담은 사연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평창군수 남희로(南義老)가 기문을 지었으며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글씨를 써서 1795년 8월 세웠다. 1820년 3월에는 홍직필(洪直弼)이 영월을 유람하던 중 비석을 보고 「월기경춘전」을 지었다.

[위치]

월기경춘순절비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38번지에 있다. 금강정 낙화암 일대에 있다.

[형태]

월기경춘순절비는 화강암 비신에 상단부를 둥글게 처리하였으며 비갓은 없다. 높이 109㎝, 너비 47㎝, 두께 14.5㎝ 규모이다. 글자는 음각으로 새겼다.

[금석문]

월기경춘순절비는 비 앞면에 한 줄로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之處)’라고 새겼다. 뒷면에 ‘월기 경춘(越妓瓊春)’으로 시작되는 경춘의 생애와 절의 일화, 비 건립 경위를 담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비문 말미에 3줄로 ‘을묘 팔월 평창군수 남희로 기 영월부사 한정운 서(乙卯 八月 平昌郡守 南義老 記 寧越府使 韓鼎運 書)’가 음각되어 건립 날짜와 건립자를 알려 준다.

[현황]

월기경춘순절비는 건립된 이후 원래 위치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오솔길에 비만 세워져 있었으나 이후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건립된 지 220여 년이 흐르면서 뒷면의 비문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었으며 일부는 고의적으로 훼손된 흔적이 있다. 비문에는 없으나 경춘이 살았던 마을은 덕포리 상덕촌이고 아버지는 고순익(高舜益)으로 단종[노산군]이 점지한 딸이라고 하여 어릴 때 노옥(魯玉)으로 불렸으며 이시랑은 영월부사 이만회(李萬恢)의 아들 이수학(李秀鶴)으로 전한다. 1772년 당시 영월부사는 구협(具埉)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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