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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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慕院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장충동길 162[판운리 377]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석 |
현 소재지 | 충모원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장충동길 162[판운리 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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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당 |
[정의]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판운리에 있는 병자호란 때 장군 지계최의 사당.
[개설]
충모원(忠慕院)은 조선 시대 무신 지계최(池繼漼)[1593~1637]를 모신 사당이다. 지계최는 본관이 충주(忠州), 자는 언숙(彦淑), 호는 표곡(豹谷)이다. 지계최는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웠고, 북방의 국경 부근에서 근무한 무관이었다. 지계최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이다. 첫째, 1624년(인조 2) 1월 일어난 이괄(李适)의 반란 때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진무공신(振武功臣)이 된 27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때 지계최는 3등으로 한 등급 승진하였다. 둘째, 1631년(인조 9) 7월 10일 왕으로부터 활과 화살을 받았다. 당시 지계최는 소모장(召募將)이었는데, 청나라와 조선의 갈등이 생겨나자 적과 싸우기를 자원하였으므로 상을 내린 것이다. 셋째, 1631년 12월 24일 지계최가 상소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 지계최는 당시 희천군(熙川郡)의 군수였는데, 청나라와 전쟁을 할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을 전투가 일어날지 모르는 안주(安州)와 황주(黃州) 양 진(陣) 사이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지계최의 병자호란 때 행적은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고산선생문집(鼓山先生文集卷)』에 실려 있는 「충성군지계최전(忠城君池繼漼傳)」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충성군지계최전」에 의하면 지계최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신계(新溪)에서 적과 싸우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지계최는 몸에 맞은 화살이 마치 고슴도치처럼 되자,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남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제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나라 일은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말한 후에 눈을 부릅뜨고 칼을 잡고 서서 죽었다고 한다. 이때가 정축년 정월 4일이었다.
[위치]
충모원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판운리 377번지에 있다.
[변천]
충모원은 지계최 장군의 후손이 현대에 개인적으로 세운 것이다.
[형태]
충모원은 일반 주택의 형태이다.
[현황]
충모원에는 영월충공신사적비(寧月忠功臣事蹟碑)가 있다. 지계최의 충신(忠臣) 정려각(旌閭閣)은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에 있는데, 여기에는 ‘충신 정헌대부 한성판윤 봉충성부원군 행통훈대부 서흥부사(忠臣正憲大夫漢城判尹封忠城府院君行通訓大夫瑞興府使)’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그리고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에도 충신문(忠臣門)이라는 비각이 있다.
[의의와 평가]
병자호란 때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지계최 장군의 후손이 선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