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713
한자 蔡聖龜
영어공식명칭 Chae Sunggu
이칭/별칭 용구(用九),지비재(知非齋),충헌(忠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희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5년연표보기 - 채성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30년 - 채성구 식년문과 을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44년 1월 3일연표보기 - 채성구 영월군수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47년연표보기 - 채성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55년 - 채성구 이조판서 겸 대제학 증직
출생지 진천 - 충청북도 진천군
부임|활동지 영월군 - 강원도 영월군
성격 문관
성별 남성
본관 평강(平康)
대표 관직 영월군수|예조정랑

[정의]

조선 후기 영월군수를 역임한 문관.

[가계]

채성구(蔡聖龜)[1605~1647]의 본관은 평강(平康)이며, 자는 용구(用九), 호는 지비재(知非齋)이다. 할아버지는 채정간(蔡廷侃)이고, 아버지는 채진형(蔡震亨)이다. 어머니는 김몽정(金夢禎)의 딸 강릉김씨(江陵金氏)이다.

[활동 사항]

채성구는 1605년(선조 38)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1630년(인조 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으로 발령을 받아 학유·학록·학정·박사를 지냈다. 이후 사헌부감찰·형조좌랑·사헌부지평·예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채성구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두 차례에 걸쳐 화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특히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인조를 위문하고 율시를 지어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청나라와의 강화가 이루어지자 채성구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 진천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채성구는 1644년(인조 22) 1월 3일 영월군수로 부임하였고, 1645년 2월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영월을 떠났다. 영월군민들이 덕정비(德政碑)를 세워 채성구의 공적을 기렸다. 채성구는 1647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채성구는 1755년(영조 31) 병자호란 때의 절의를 인정받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증직되었고,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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