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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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債報償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을경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7년 2월 - 국채보상운동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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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907년 4월 - 국채보상운동 충청도 지역으로 전개 |
성격 | 애국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김광제(金光濟) |
[정의]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한 주권 수호 운동으로, 서상돈 등의 제안으로 일본에서 빌린 1,300만 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고자 보령 지역에서 일어났던 애국 운동.
[개설]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서는 182명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모금된 의연금은 243원 61전이다.
[역사적 배경]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화폐 정리 및 시설 개선 등을 명목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오게 하였다. 일본의 계획에는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일본에 예속시켜 식민지화를 공고화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1907년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의 총액은 대한제국의 1년 예산과 비슷한 수준인 1,300만 원이었다. 1907년 1월에 대구광문사에서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회의가 진행되었을 때, 광문사의 사장 김광제(金光濟)[1866~1920]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이 국채 1,300만 원을 갚지 못하게 된다면 앞으로 나라를 팔아서라도 갚아야 하는 상황이니 우리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피우지 말고 담배값을 모아 국채를 갚자는 제안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경과]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인 확산을 위하여 김광제는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國債一千三百萬圜報償趣旨書)」라는 격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취지서의 내용은 무능한 정부에 나라의 존망을 맡기지 말고 국민들이 단결하여 국채보상을 추진하여 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주권을 찾자는 것이었다. 이렇듯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출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온 국민이 참여하였다.
당시 의연금을 자진하여 납부하였던 계층은 귀족이나 부유층보다는 일반 서민층이었으며, 국채보상기성회와 각종 애국 계몽 단체 및 언론기관이 나서서 전 국민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국채보상금 횡령 사건을 날조하는 등 탄압하였고,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중단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김광제가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출신이라는 점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의의는 지역적으로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김광제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갔다가 동학군 진압 및 의병 운동에 참여하는 등의 국권 회복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린 후 관직을 사퇴하고 대구광문사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충청도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4월 보상소가 설립되면서 전개되었다. 보은군, 청주군, 옥천군, 서천군, 한산, 금산군, 덕산, 영동군, 진천, 공주군, 제천 등에 보상소가 설립되었으며, 1907년 5월 말까지 충청남도 지역에서 모금된 국채보상 의연금은 총 156,698원 55전이었다. 이때 보령 지역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한 사실도 확인이 가능하다. 황성신문에서 확인되는 1907년 7월 이후 보령 지역의 참여자 수는 182명이며, 이때 모금된 의연금은 243원 61전이었다.
[결과]
전 국민이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은 20만 원의 자금을 의연금으로 모았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여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는 한계점을 드러내었다.
[의의와 평가]
국채보상운동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겠다는 의도로 국민이 스스로 일어난 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다만, 체계적인 계획이 구상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통일된 지휘 체계를 갖추지 않아 일본의 탄압에 제대로 대응하여 애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결과가 미비하였다는 점에서는 한계로 지적된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이라는 운동 자체가 국권 회복이나 독립운동으로서 하나의 방향을 설정하였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충청남도 보령 출신인 김광제라는 점도 보령의 독립운동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