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4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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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馬高地戰鬪 |
영어공식명칭 | Baengma Hill Battl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규 |
[정의]
6·25전쟁 중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철원 지역 백마고지에서 한국군이 중공군 공격을 격퇴한 전투.
[개설]
백마고지 전투는 휴전회담이 난항을 겪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평야 요충지인 백마고지[395고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한국군 제9사단 백마부대가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열흘 동안 혈전을 벌여 1만 4000여 명을 격멸하였다.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된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여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백마고지는 그리 높지 않으나 광활한 철원평야와 서울로 통하는 경원선과 국도 제3호, 즉 한국군의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휴전회담이 계속 결렬되는 상황에서 백마고지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한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경과]
1952년 10월 6일 아침부터 중공군이 한국군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사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중공군은 북쪽 5㎞ 지점에 있는 봉래호 수문을 폭파하여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켜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을 차단하는 작전을 펼쳤다. 중공군은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며칠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으로 제28연대와 제30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이 손실되었다.
1952년 10월 11일 밤 고지를 다시 중공군에 빼앗겼으나, 12일 아침 제30연대가 고지를 재탈환하였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또 빼았겼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벌여 마침내 탈환하였다. 이어 제29연대가 나서서 백마고지 북쪽 낙타능선상 전초진지를 탈환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결과]
국군 제9사단은 1952년 10월 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아 10일 동안 12차례 쟁탈전을 반복하다가 끝내 백마고지를 사수하였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여 1만 4389명이 전사자, 부상자 또는 포로가 되었고, 국군 제9사단도 3,146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의의와 평가]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군의 전투 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 지휘 능력을 과시한 전투이고, 철원평야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현재의 철원군이 자리매김하게 되는 결정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아군과 중공군 1만 7535명의 영혼을 진혼하기 위하여, 1985년 6월 6일[현충일] 보병 제5사단 장병과 지역 주민들이 백마고지 전투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1990년 5월 3일 백마고지 전적지 공원을 조성하면서 백마고지 전적비와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