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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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昌彦 |
이칭/별칭 | 도사(道師),남궁원수(南宮元帥)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찬식 |
[정의]
일제 강점기 무극대도교 신도로서 제주에서 활동한 항일 운동가.
[활동 사항]
본관은 광산. 1888년 남원면 신예리 1366번지에서 양성택의 아들로 태어난 양창언(梁昌彦)은 수년간 한문을 수학한 후, 1917년경 민족 종교인 보천교를 믿었으나 중도에 그만두었다. 1936년 9월 강석구의 권유로 무극대도교를 믿게 되어 도사(道師) 및 남궁원수(南宮元帥)의 칭호를 받고 포교 활동을 하였다.
무극대도교는 1927년 4월 창시된 천도교 계통의 신흥 종교로서 평양에 본부를 두어 외세 및 서교 배척을 교의로 한 민족 종교였다. 제주에는 한의원을 경영하던 강승태에 의해 전교되었는데, 강승태는 안덕면 동광리에 포교 본부를 두고 제주도의 교주라고 자처하였다. 또한 정도령이 나타나 조선을 독립시킨 다음 전 세계를 지배할 것이며, 그때가 되면 무극대도의 신도들은 성인의 반열에 올라 영원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그의 주장을 듣고 모여든 신자가 1천여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날로 교세가 늘자 1937년 12월 13일 제주경찰서의 다니모도[谷本] 고등계 주임은 무극대도교 교주 및 교도를 「치안 유지법」·「총포 수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일제히 검거하였다. 10개월에 걸친 심문 끝에 교주 강승태 이하 67명을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 그 중에서 23명은 구속하고 44명은 불구속으로 송치하였다. 일제 당국은 민족 종교인 무극대도교를 사교(邪敎)로 매도하여 탄압함으로써 자연 교세는 소멸되었다.
구속된 신도 가운데 21명이 기소되었는데, 양창언은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법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양창언은 1970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