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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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松東部陣徐鍾洛部隊 |
이칭/별칭 | 청송동진,청송동부지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8년 -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 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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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10년 -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 고와실전투에서 패배, 해산 |
발생|시작 장소 |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 - 경상북도 청송군 |
종결 장소 |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백석탄 |
성격 | 의병 부대 |
관련 인물/단체 | 서종락|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 |
[정의]
1908년 경상북도 청송군 동부 지역에서 편성된 의병 부대.
[개설]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靑松東部陣徐鍾洛部隊)는 최세윤(崔世允)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지대(支隊)로서 1908년 2월부터 1910년경까지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 활동하다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에서 패하고 해산되었다.
[역사적 배경]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는 의병 항쟁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때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는 이현규(李鉉圭)의 진성의진(眞城義陣), 신돌석의 영해의진(寧海義陣),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 등이 활동하였다. 이것은 대한제국 국권을 노골적으로 침략하는 일제 침략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는 일제 침략으로부터 청송 지역을 지키기 위해 편성된 의병부대였다.
[경과]
서종락(徐鍾洛)은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출신으로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정용기가 산남의진을 일으킬 때, 남석구(南錫球), 남석인(南錫仁), 심일지(沈一之), 임용상(林龍相) 등과 함께 청송 지역에서 군사를 모아 합류하고 선봉장(先鋒將)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9월 산남의진이 입암전투(笠巖戰鬪)에서 패하자 청송 지역으로 돌아가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었다.
1908년 2월 최세윤이 산남의진의 3대 대장에 오르자 경상도 지역만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의진을 본부와 지대로 나누고, 각 지역의 책임자를 정해 지대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때 청송 지역에서 의병부대를 이끌던 서종락은 주왕산(周王山)을 근거지로 하는 청송동부진(靑松東部陣)을 담당하였다.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는 대장(大將) 서종락, 중군(中軍) 우영조(禹永祚), 도총(都摠) 오상영(吳相泳), 참모장(參謀將) 심일지(沈一之), 소모장(召募將) 윤용식(尹龍植), 종사(從事) 남정철(南定喆), 군문집사(軍門執事) 조경옥(趙景玉), 도포장(都砲將) 심지국(沈智國)으로 편성되었고, 김진영(金震榮), 김안동(金安東), 박문선(朴文善), 남석광(朴錫光), 배상언(裵尙彦) 등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1908년 4월 15일 청송 부근의 의병 400여 명이 청송읍을 공격할 예정이라고 하였고, 또 4월 16일 의병 40명이 청송을 공격하였으나 18명의 전사자를 내고 물러갔으며, 4월 29일 청송 동쪽 30리 지점에서 의병 62명과 교전하여 의병 측에 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하였다. 이후에도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해 음력 6월에도 청송에서 적을 격퇴하였다. 일본군은 7월 11일 청송 동북 약 30리[약 12㎞] 지점에서 의병 약 30명과 교전하여 12명을 사살하였다. 전투 결과에 대해서는 의병과 일본군이 사뭇 다르게 기록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와 일본군과의 교전 횟수가 많았고 격렬하였다는 사실이다.
서종락이 이끄는 청송동부진은 음력 3월에서 6월 사이 청송 지역에서 항쟁하였고, 규모는 40~400명으로 전투를 치를 때마다 희생도 컸다. 청송동부진의 항쟁은 계속되었지만 산남의진 본진이 해산되고 최세윤에 이어 서종락도 1908년 11월 26일 일본군에게 잡히면서 구심점을 잃고 해체의 길을 걸었다. 일부 남은 병사들이 1910년 안덕면 고와실전투에도 참전하였으나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활동이 종결되었다.
[결과]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는 청송 출신 서종락의 지휘로 1908년 2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국권 수호라는 목적 아래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항쟁을 펼쳤다. 이 항전은 1910년 안덕면 고와실전투로 종결되었다. 일본군 수비대에게 잡힌 의병들은 백석탄(白石灘) 물속 바위 위에서 무자비하게 학살되었고, 의병들이 쏟은 피는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전한다.
[의의와 평가]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는 일본군과 여러 차례 격전을 펼쳤다. 크고 작은 전과도 있었지만 나라가 여지없이 무너져 가고 있던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부대를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그 숭고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의 활동은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와 함께 청송 지역 한말 의병항쟁의 마지막 단계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