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1586
한자 高臥室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고와실전투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고와실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고와실 - 경북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고와실 - 경북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전쟁
관련 인물/단체 산남의진|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

[정의]

1910년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에서 펼쳐진 의병 전투.

[개설]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는 1910년 경상북도 경주·영천·의흥·청송 지역의 일본군 수비대로 편성된 합동 토벌대를 맞이한 산남의진(山南義陣)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에서 치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해산되었다.

[역사적 배경]

1908년 4월 26일 청송군 현서면 복기동전투(復基洞戰鬪) 이후 청송 지역에는 소수의 의병부대가 활동하였다. 1908년 8월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 최세윤(崔世允)이 경상북도 장기군 내남면 용동(龍洞)에서 피체(被逮)되자, 산남의진은 그 구심력을 잃고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청송 지역은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 등의 의병부대가 유격전을 통한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경과]

1908년 4월 이후 서종락남석구가 이끄는 산남의진의 지역부대인 청송동부진청송서부진은 유격전을 통한 대일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1910년 서종락이 이끄는 의병들은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으면서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에 숨어들었다. 곧이어 경상북도 경주·영천·의흥·청송 지역을 관할하던 일본군 수비대도 고와리로 의병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주위를 포위하였다. 일본군 합동 토벌대는 고와리를 포위하고 사격을 가했다. 포위 공격을 받게 된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였고, 미처 피하지 못한 의병들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1910년 청송군 부남면 출신의 배연집(裵淵楫)은 청송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종락과 함께 경주·영천·의흥·청송 지역을 관할하는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피해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로 들어갔다. 대장 서종락을 비롯한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였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의병들은 고와실 앞으로 흐르는 길안천(吉安川) 백석탄(白石灘)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고와실전투를 끝으로 산남의진의 지역부대인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는 해산하였다. 배연집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 배연집은 탈출하는 과정에서 고와실마을로 잠입하여 김씨가(金氏家)의 풍산유씨(豐山柳氏) 부인이 목화를 따서 실을 잦고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고, 풍산유씨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서종락 의병장은 고와리 앞을 흐르는 백석탄을 따라 물밑으로 30여 리를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체포된 의병들은 두 손이 묶인 채 백석탄에서 총살되었다.

[결과]

1910년 고와실전투를 끝으로 산남의진의 지역부대인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는 해산하였다. 청송 출신의 의병들은 체포되거나 귀순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은거하거나 중국 만주(滿洲) 등 해외로 망명하였다. 산남의진에 참여했던 청송 출신의 김성극(金聖極), 이규환(李圭桓), 홍구섭(洪龜燮), 남정철(南井喆), 남규철(南圭喆), 김남준(金南俊), 김진영(金震榮) 등이 망명하였다.

[의의와 평가]

1910년 고와실전투산남의진의 지역부대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가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한 전투이다. 청송 지역 일원에서 불굴의 항전을 벌이던 의병들은 일본군의 포위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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