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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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松西部陣南錫球部隊 |
이칭/별칭 | 청송서진,청송서부지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8년 -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 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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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10년 -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 고와실전투에서 패배, 해산 |
발생|시작 장소 |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 - 경상북도 청송군 |
종결 장소 |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백석탄 |
성격 | 의병 부대 |
관련 인물/단체 | 남석구|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 |
[정의]
1908년 경상북도 청송군 서부 지역에서 편성된 의병 부대.
[개설]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靑松西部陣南錫球部隊)는 1908년 3월 철령(鐵嶺)을 근거지로 경상북도 청송 서부 지역을 지키기 위해 편성된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지역 부대였다. 일본군과 여러 차례 격전을 벌인 뒤 1910년 청송군 안덕면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역사적 배경]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및 군대 해산 등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권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다. 이 같은 국권 상실의 위기를 맞은 애국지사들이 구국항쟁 대열에 다투어 투신함으로써 항일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경과]
1908년 3월 최세윤(崔世允) 대장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일제 침략으로부터 경상도 지역만이라도 지키고자 지구전(持久戰)을 계획하고, 최세윤 대장은 본대를 이끌고 남동대산(南東大山)을 중심으로 경주·울산·흥해·포항 지역을 담당하는 동시에 각 지대(支隊)를 총괄하였다. 이때 청송 지역은 서종락(徐鍾洛)이 지휘하는 동부진과 남석구(南錫球)가 지휘하는 서부진으로 나누고, 서부진은 철령을 근거지로, 동부진은 주왕산(周王山)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남석구는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출신으로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의진을 일으킬 때, 서종락, 남석인(南錫仁), 심일지(沈一之), 임용상(林龍相) 등과 함께 청송 지역에서 군사를 모아 의진에 합류했던 인물이다. 산남의진이 정용기 대장에 이어 정환직(鄭煥直) 대장마저 순국하자, 남은 병사들은 1908년 3월 영천 보현산(普賢山)에서 최세윤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투쟁 전략을 소부대 유격전(遊擊戰)을 통한 지구전을 펼치기로 하였다. 최세윤은 본진 이외에 경상도 각 지역에 지대 책임자를 배정하였는데, 이때 남석구는 청송 서부 지역을 맡아 활동하였다.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는 1908년 음력 3월 청송군 현서면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일본군 기록은 그해 4월 26일 현서면 복기동에 의병 60여 명이 출현하였는데 그 가운데 15명을 사살하였다고 하였다. 또 6월 20일에도 청송 남방에서 의병 60여 명과 접전을 하여 의병 15명을 사살하여 격퇴시켰다고 하였다. 일본군 기록은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의 활동이 그만큼 격전을 벌였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후에도 활동은 계속되었으나 1910년 안덕면 고와실전투의 패배로 활동은 종결되었다.
[결과]
1907년 12월 산남의진의 정환직 대장이 순국하고, 이듬해 1908년 3월 최세윤 대장이 취임하여 의진의 전략을 지대별 유격전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남석구는 철령을 근거지로 청송 서부 지역을 담당하여 수차례 일본군과 교전을 펼쳤으나, 증강되는 일본군 토벌대와 의병들의 체포 순국 및 탄약, 식량의 고갈 등으로 전황은 극도로 불리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 안덕면 고와실전투의 패배로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뿐만 아니라 청송 지역의 의병 활동은 거의 종결되었다.
[의의와 평가]
1908년 3월 이후 남석구는 철령을 근거지로 청송서부진을 지휘하여 경상북도 청송 지역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였다. 비록 큰 성과는 일궈내지 못했지만, 의진 활동을 통한 의병 항쟁으로 한말 국권수호운동의 한 축을 이루어 갔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