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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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普賢山共匪掃蕩作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허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8년 06월 12일 - 보현산공비소탕작전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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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보현산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
종결 장소 | 보현산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청송경찰서 |
[정의]
1948년 6월 경찰이 경상북도 청송군 보현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좌익 무장 유격대를 진압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45년 광복 직후 청송 지역에서는 좌익 세력이 인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 등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6년 좌익 세력이 미군정 철폐와 친일파 처벌, 식량문제의 해결 등을 요구하며 일어난 ‘10월 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청송 지역에서도 민주청년동맹에 소속된 청년들이 청송경찰서를 점거하였고, 이 과정에서 경찰이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이 이 사건에 가담한 청년을 포함한 좌익 세력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좌익 세력은 보현산(普賢山)[1,124m], 주왕산(周王山)[720.6m] 등 청송 지역의 주요 산으로 피신하여 활동하였다.
1947년 들어 미국은 소련에 대한 강경한 대외 정책을 채택하고, 한국 문제도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유엔으로 이관하여 해결하려는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이와 동시에 미국과 미군정을 비판하던 좌익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이에 좌익 세력은 산으로 거점을 옮겨 본격적인 무장 유격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청송군 부동지서와 안덕지서가 좌익 무장 유격대의 공격을 받았으며, 파천면에서는 우익 성향을 가진 인사의 집이 방화로 소실되기도 하였다.
[경과]
경찰은 좌익 무장 유격대의 활동으로 지역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지역민이 인적, 물적 피해를 보자, 좌익 무장 유격대를 진압하기 위한 작전을 모색하였다. 경찰은 좌익 무장 유격 활동을 위해 입산한 지역민이 다시 집으로 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산에 들어가 좌익 무장 유격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확인된 주민의 집을 비롯하여 좌익 무장 유격대가 자주 나타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잠복하였다.
잠복 활동을 통해 파천면 송강리에서 좌익 무장 유격 활동을 위해 입산했다가 귀가하는 청년을 체포하였다. 경찰은 청년을 심문하여 보현산에 좌익 무장 유격대의 본거지가 있다는 사실과 좌익 무장 유격대의 활동 방침을 알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경찰은 보현산에 은둔하고 있는 좌익 무장 유격대를 진압할 작전 계획을 마련하였다.
[결과]
1948년 6월 12일 청송경찰서는 좌익 무장 유격대의 경비가 허술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른 아침에 보현산에 있는 좌익 무장 유격대의 근거지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날 오전 5시 30분 무렵 보현산에 좌익 무장 유격대가 은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무장 경관대를 파견하여 좌익 무장 유격대 근거지를 급습하였다.
이때 서로 간에 총격전을 벌어졌지만, 좌익 무장 유격대 대원 신태임(申泰任)을 비롯한 8명을 사살하고 2명을 체포하여 좌익 무장 유격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또한 좌익 무장 유격대가 소지하고 있던 99식 장총 3정, 38식 장총 2정, 99식 실탄 40발, 38식 실탄 6발, 권총 실탄 62발, 화약, 문서 등 다수를 압수하였다. 이날 작전으로 좌익 무장 유격대에 큰 타격을 입혀 일시적이지만 지역의 혼란을 수습하고 좌익 무장 유격대의 활동을 약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