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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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反共鬪爭 |
영어공식명칭 | Anti-Communism Struggl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허종 |
종결 시기/일시 | 1950년 - 반공투쟁 진압 작전 종결 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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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56년 - 반공투쟁 진압 작전 완전 종결 시기 |
성격 | 반공투쟁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좌익 무장 유격대[빨치산] |
[정의]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56년까지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 좌익 무장 유격대의 활동을 진압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45년 광복 직후 청송 지역의 도심에서 활동하던 좌익 세력은 1946년 미군정이 탄압을 강화하자 산으로 도피하여 산발적인 무장 유격 활동을 벌였다. 1947년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키고 정부 수립의 유리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면서 좌익 세력의 무장 유격 활동은 강화되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가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정, 즉 남한만의 선거를 의미하는 결정을 내리자, 좌익 세력은 선거를 무산시키고 정부 수립을 저지하려는 활동을 벌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청송 지역에서는 좌익 세력이 보현산(普賢山)[1,124m]을 거점으로 주왕산(周王山)[720.6m]을 비롯한 청송 지역의 크고 작은 산을 근거지로 삼아 무장 유격 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경과]
1948년 5.10총선거와 정부 수립을 앞두고 좌익 세력이 남한 전역에서 선거와 정부 수립을 방해하는 활동을 벌이자 미군정은 좌익 세력을 진압하는 작전을 펼쳤다. 청송 지역에서도 1948년 6월 경찰이 보현산에 좌익 무장 유격대가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장 경찰을 동원하여 좌익 무장 유격대의 본부를 습격하였다. 경찰은 총격전을 통해 좌익 무장 유격대 대원을 사살하고 무기 등을 압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청송 지역에서 좌익 무장 유격대의 활동은 크게 약화되었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사건[제주 4.3사건의 잔여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한 군 부대를 제주도로 보내려고 하자 군대 내 좌익 세력이 반발하여 여수와 순천 지역을 점령한 사건]’으로 국군이 호남과 경상남도 지역으로 집중 투입되고 사회가 혼란해지자, 북한은 이를 호기로 인식하여 1948년 11월 이후 인민유격대를 남파하였다. 1949년 8월 김달삼이 이끄는 인민유격대가 보현산을 거점으로 주왕산 등지에서 본격적인 유격 투쟁을 벌였다. 특히 9월 총공세의 일환으로 10월에는 부동지서[부동지서내습사건]와 부남지서를 습격하는 등 유격 투쟁을 강화하였다.
군과 경찰은 1949년 9월에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11월에 보현산공비소탕작전을 펼쳐 보현산에 있는 좌익 무장 유격대 본부를 공격하고, 동대산(東大山)[791m]과 면봉산(眠峯山)[1,120.6m] 등지에서 유격대를 진압하는 등의 작전을 전개하였다. 12월에는 '영남지구 토벌사령부'를 설치하여 1950년 1월부터 3월까지 주왕산, 구암산(九巖山)[807m] 등지와 관내 좌익 무장 유격대 근거지를 공격하였다. 군과 경찰의 진압작전으로 좌익 무장 유격대의 활동이 약화되어 1950년 3월에 진압 작전을 사실상 종료하였다. 하지만 좌익 무장 유격대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간헐적으로 활동을 이어 나갔다.
[결과]
6.25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 정규군의 유격대와 잔여 좌익 무장 유격대가 결합하여 일시적으로 좌익 무장 유격대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좌익 무장 유격대의 활동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일부가 이들과 합류하여 주왕산 등지에서 산발적인 유격 활동을 벌였다. 군과 경찰의 대대적인 좌익 무장 유격대 진압 작전으로 6.25전쟁 기간 중 좌익 무장 유격대는 거의 궤멸되었으며, 1956년 6월 무렵 좌익 무장 유격대의 진압이 완전히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