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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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明利 |
영어공식명칭 | Kwon Myeongri |
이칭/별칭 | 만취당(晩翠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위은숙 |
거주|이주지 | 안덕현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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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대표 관직 | 사옹원직장 |
[정의]
조선 전기 청송 지역에 정착한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만취당(晩翠堂). 안동권씨 15개파 중 급사중공파(給事中公派)의 파조 권형윤(權衡允)의 5세손이다. 사위는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참의에 이르렀던 손사성(孫士晟)이며, 외손자는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낸 손욱(孫旭)과 이시애의 난 때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고 공조참의를 역임한 손소(孫昭) 형제 등이 있다.
[활동 사항]
권명리(權明利)[?~?]는 어릴 때부터 기개가 뛰어났고, 성장해서는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을 역임하였다. 안동에 거주하다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일대인 안덕현(安德縣)으로 이주하였다. 18세 때 왜구를 피하여 산골짜기에 들어갔다가 병화를 피해 피난 온 정승 집 딸을 만나 잘 보호하여 무사히 부모에게 돌려보냈다. 정승 집 부모가 혹시 서로 사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결혼할 것을 청하였으나, 권명리는 그러한 사실이 절대 없었음을 맹세하고 굳이 사양하였다. 세도가의 어려운 형편을 틈타 장가드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였고 후세에조차 그러한 말이 전해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유성룡(柳成龍)이 『영가지(永嘉誌)』에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
[학문과 저술]
권명리는 청송군 안덕면의 자산가로 자녀들에게 분재(分財)한 허여문기(許與文記)가 전해진다. 이 고문서는 사위 손사성(孫士晟)의 후손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마을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손씨 문중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