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1487
한자 437年-傳統, 靑松都護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백지국

[개설]

조선시대 청송 지역에는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다. 도호부란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구역으로, 목(牧)과 군(郡)의 중간에 해당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된 도호부는 모두 44개 처[경기도 7·경상도 7·전라도 4·황해도 4·강원도 5·영안도 11·평안도 6]이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31개가 늘어나 모두 75개 처[경기도 8·충청도 1·경상도 14·전라도 7·황해도 6·강원도 7·함경도 18·평안도 14]에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읍의 규모에 비해 상위 행정구역인 도호부가 청송에 설치된 이유는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의 내향(內鄕)이었기 때문이다. 청송은 1459년(세조 5) 도호부가 설치된 이래 1895년(고종 32) 청송군으로 개편될 때까지 437년간 도호부로 존속하였다.

[청송도호부가 되기까지]

전통 시대 청송의 명칭은 청기(靑己)·적선(積善)·부이(鳧伊)·운봉(雲鳳)·청부(靑鳧)·청보(靑寶) 등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청기현(靑己縣)이 있었다. 경덕왕 때 적선현(積善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야성군(野城郡)[지금의 영덕]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초에는 부이현(鳧伊縣)·운봉현(雲鳳縣)으로 불렀다. 986년(성종 4) 청부현(靑鳧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예주(禮州)[지금의 영덕]로 내속(來屬)시켰다.

1394년(태조 3) 진보현(眞寶縣)[현재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일대]과 병합하였다. 1419년(세종 원년) 소헌왕후의 고향이므로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이름을 청보라 하였다. 1423년(세종 5) 송생현(松生縣)을 병합하여 이름을 청송(靑松)으로 고치고, 진보현은 현감을 파견하여 분리하였다. 1459년 소헌왕후의 내향이므로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는 고려의 다원적이고 신분적인 군현제를 극복하기 위해 인구·면적 등 객관적인 조건 등을 바탕으로 군현제를 개편하였으나, 청송의 예와 같이 왕비의 내향이거나 왕의 외향(外鄕), 왕의 안태지(安胎地) 등의 이유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왕비의 내향, 혹은 외향으로 승격된 지역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내향인 진주(晉州), 정안왕후(定安王后)의 외향인 담양(潭陽),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내향인 여주(驪州),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내향인 파주(坡州), 폐비신씨(廢妃愼氏)[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와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내향인 거창 등이 있다. 인천의 경우 1460년(세조 6) 소헌왕후의 외가 또는 정희왕후의 외가 고을이므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청송도호부의 모습]

조선시대 청송도호부의 모습은 읍지류 및 고지도를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먼저 청송도호부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사방 경계는 동쪽은 영덕현(盈德縣) 경계까지 49리[약 19㎞], 서쪽은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19리[약 7.5㎞], 남쪽은 영천군(永川郡) 경계까지 74리[약 29㎞], 북쪽은 진보현 경계까지 5리[약 2㎞]이다. 『여지도서』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18세기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와 19세기 제작된 「광여도(廣輿圖)」에는 동남쪽은 경주까지 70리[약 27㎞], 서쪽은 안동까지 20리[약 7.9㎞], 서남은 의성(義城)까지 80리[약 31㎞], 남쪽은 신녕(新寧)까지 70리, 북쪽은 진보(眞寶)까지 6리[약 2.4㎞]이다. 읍지와 비교해 보았을 때 동남·서남쪽의 경계가 변동되었다.

행정구역은 면리제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주현(州縣)인 청송, 직촌(直村)인 송생, 속현(屬縣)인 안덕현(安德縣)으로 편제되었다. 송생현의 경우 사료의 소략으로 신라 때 명칭은 알 수 없다. 1018년(현종 8) 예주에 내속되었다. 1143년(인종 21) 감무를 파견하고 독립하였다. 1394년 안덕현을 병합하였다. 1423년 청부현과 병합하여 청송으로 이름을 고치고 직촌이 되었다. 옛 읍치는 청송부의 동쪽 15리[약 6㎞]에 있다.

안덕현은 고구려의 이화혜현(伊火兮縣)이다. 신라 경덕왕 때 연무(緣武)로 이름을 고치고 곡성군(曲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안덕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018년 안동부로 내속시켰다.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파견하였다. 1394년 송생현에 병합되었으며, 1423년 송생현이 청송에 병합될 때 함께 내속되었다.

면리제 시행 이후 부내면(府內面)·부동면(府東面)[현 주왕산면]·부서면(府西面)·현동면(縣東面)·현서면(縣西面)·현남면(縣南面)·현북면(縣北面) 7개의 면으로 정리되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따르면 부내면은 관아에서 5리, 부동면[현 주왕산면]은 관아에서 60리[약 23.6㎞], 부남면은 관아에서 60리, 부서면은 관아에서 19리, 현서면은 관아에서 50리[약 20㎞], 현동면은 관아에서 70리, 현남면은 관아에서 80리, 현북면은 관아에서 40리 거리에 있었다. 「비변사인방안지도」에는 부내면은 관아에서 5리, 부서면은 관아에서 8리, 부동면[현 주왕산면]은 관아에서 20리, 부남면은 관아에서 25리, 현동면은 관아에서 42리[약 16.5㎞], 현남면은 관아에서 60리, 현내면은 관아에서 46리[약 18㎞], 현북면은 관아에서 30리 거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청송도호부의 인구는 도호부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19세기까지 지리지와 읍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경상도지리지』에는 청송군의 인구를 청송·송생·안덕으로 구분하여 수록하고 있다. 청송의 원호는 36호, 남자 215명, 여자 158명, 총 373명이다. 송생의 원호는 50호, 남자 343명, 여자 364명, 총 707명이다. 안덕의 원호는 48호, 남자 255명, 여자 254명 총 509명이다. 청송군 전체 호구는 원호 134호, 남자 813명, 여자 776명, 총 1,589명이다.

청송도호부 설치 이후 인구는 『여지도서』, 『청송부읍지(靑松府邑誌)』(1788~1790), 『호구총수(戶口總數)』(1789) 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여지도서』의 1759년(영조 35) 조사된 내용에 따르면, 원호 996호, 남자 4,737명, 여자 5,640명, 총 1만 377명이었다. 조선 전기에 비해 호구수가 상당히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청송부읍지』(1788~1790)에는 1785년 호구수가 기재되어 있다. 원호 3,241호, 남자 4,654명, 여자 6,755명, 총 1만 1,409명이다. 30년 사이에 원호는 542호, 1,032명 증가하였다. 『호구총수』에 기재된 1789년 청송의 호구는 원호 3,259호, 남자 4,763명, 여자 6,785명, 총 1만 1,548명으로 조사되었다. 3년 사이 큰 변동은 없으나 호구가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 에 따르면 청송의 토성은 심(沈)·김(金)·전(全)·장(蔣)·신(申) 다섯이다. 송생의 토성은 윤(尹)·노(盧)·김(金) 셋이다. 내성(來姓)으로는 김(金)·박(朴)·이(李)와 촌성(村姓) 정(鄭)이 있다. 안덕의 토성은 김(金)·이(李)·손(孫)·전(全)·장(蔣)[『신증동국여지승람』부터 설(薛)로 기재] 다섯이 있다. 『여지도서』이후 내성으로 조(趙)·권(權)·민(閔)·신(申)·남(南)·서(徐) 등이 기재되어 있다.

청송도호부에는 교통 시설인 4개의 역(驛)과 숙박 시설인 3개의 원(院)이 운영되었다.

『경상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각각 3개의 역이 기재되어 있다.『경상도지리지』에는 신안(新安)·남역(南驛)·주등(酒登),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신안·문거(文居)·화목(和睦),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청운(靑雲)·문거·화목이다. 『여지도서』에는 청운·문거·화목과 함께 신증(新增) 이전평역(梨田坪驛)이 있다. 이후 읍지는 『여지도서』의 기록과 동일하다. 원(院)은 삼자(三者)·지(枝)·눌인(訥仁) 등 3개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주방산 석성(周房山石城)이 군의 동쪽 23리[약 9㎞]에 있었다고 한다. 둘레가 183보로 삼면이 천연[天作]으로 된 성(城)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부터 고적(古跡) 항목에 기재되어 있다. 봉수(烽燧)는 없다.

제언(堤堰)은 상평제(上坪堤)·보헌제(寶獻堤)·주산제(注山堤) 3개가 있다. 상평제는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둘레가 1,503척[약 455.5m], 수심이 5~8척[약 1.5~2.4m]이다. 보헌제는 부의 동쪽 30리[약 11.8㎞]에 있다. 둘레 305척[약 92m], 수심이 3척[약 0.9m]이다. 주산제는 부의 동쪽 60리[약 23.6㎞]에 있다. 둘레 1,180척[약 358m], 수심은 8척[약 2.4m]이다.

조선시대 후기 청송에서는 읍장(邑場)·속곡장(涑谷場)·천변장(川邊場)·화목장(和睦場) 등 4개의 장시(場市)가 개시되었다. 읍장은 관문 밖에서 4일과 9일, 속곡장은 부 남쪽 40리에서 3일과 8일, 천변장은 안덕현 동쪽 10리에서 5일과 10일, 화목장안덕현 서쪽 20리에서 4일과 9일 열렸다.

[청송도호부의 중심, 공해]

청송도호부의 관아 건물은 조선시대 편찬된 읍지류 및 여러 기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지도서』 공해(公廨) 항목을 보면 청송도호부 관아 건물로 객사(客舍)를 비롯하여 신민헌(新民軒), 향사당(鄕射堂), 장관청(將官廳), 군관청(軍官廳), 부사(府司), 인리청(人吏廳) 등과 찬경루(讃慶樓), 수고정(秀孤亭), 각종 창고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편찬된 『청송부읍지』(1788~1780·1832·1895)와 『경상좌도청송부읍지』 공해 항목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내아(內衙)인 연식당(燕息堂)을 비롯하여 별당인 송백당(松栢堂), 낙일재(樂一齋), 생백당(生白堂) 등이 각종 기문과 문헌을 통해 확인된다.

관아 건물은 크게 객사 영역과 동헌 영역으로 구분된다. 객사 영역은 중심 건물인 객사[운봉관(雲鳳館)]를 비롯하여, 찬경루, 무기고, 외삼문, 주사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송도호부 객사는 운봉관이라 불렀는데, 이는 청송의 옛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이곳은 전패(殿牌) 혹은 궐패(闕牌)를 모시는 건물이자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접대와 숙소로 활용된 공간이다. 1428년(세종 10) 찬경루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시열이 쓴 기문에 따르면 1600년경 한 차례 중건되었다. 이후 1717년(숙종 43) 부사 성환(成煥), 1812년(순조 12) 부사 강휘옥(姜彙鈺), 1871년(고종 8) 부사 윤현기(尹顯岐)가 중건하였다. 1896년 의병소를 설치하여 청송의진의 본부로 활용하였다.

객사는 가운데 중당(中堂) 중심으로 좌·우에 익사(翼舍)가 배치된 구조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중당과 서익사(西翼舍)가 헐리면서 동익사(東翼舍)에 「운봉관」 현판을 달고 존속하였다. 동익사는 1981년까지 청송읍사무소로 활용되었으며, 이후 유아원으로 사용되었다. 객사는 운봉관이라는 이름으로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2000년대 유교문화권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중당과 서익사를 복원하였다.

찬경루는 1428년 지청송군사(知靑松郡事) 하담이 건립한 누각이다. 자연 암반 위에 세운 16칸 2층 누각건물로 객사의 남쪽에 있다. 홍여방(洪汝方)이 보광산(普光山)에 있는 소헌왕후의 시조묘(始祖墓)를 바라보며 우러러 찬미한다는 의미로 누각의 이름을 지었다. 1688년(숙종 14) 중수하였으나 소실되었고, 1792년(정조 16)년 재건하였다. 1910년 관청 건물로 편입되었고, 1927년과 1968년 중수하였다. 찬경루는 1984년 12월 29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다.

객사 영역의 무기고는 2곳으로, 창검과 활을 보관하는 기치고, 화승총과 탄환을 보관하는 화약고이다. 사료의 소략으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2곳 모두 1871년 부사 윤현기가 중수하였다. 객사의 북쪽에 있다. 주사는 객사의 음식을 준비, 제공하는 공간이다. 사료의 소략으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외삼문은 객사 영역의 바깥문이다. 사료의 소략으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객사 영역은 2011년 4월 7일 청송군 지역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소헌공원(昭憲公園)으로 조성되었다. 공원 내에는 운봉관, 찬경루, 부사송덕비, 다도체험실이 있다. 이곳에서 청송도호부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으며, 음악회 등 각종 문화행사도 개최되고 있다.

동헌 영역은 중심 건물인 동헌[신민헌(新民軒)]을 비롯하여 연식당, 수고정, 송백당, 문루, 마방, 부사, 공고(工庫), 공수(公需), 창고, 내삼문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송도호부의 동헌은 신민헌이라 불렀다. 일명 쌍광헌(雙光軒)이라고도 한다. 방광산(放光山)을 진산(鎭山)으로 하고 보광산(普光山)을 바라보고 있어 붙인 이름이다. 이곳은 청송도호부사가 공무를 집행하는 공간이다. 안종덕(安鍾悳)이 지은 「청송군 신민헌 상량문(靑松郡新民軒上樑文)」에 따르면 선대의 성왕이 처음 고을을 두면서 정무를 보는 곳으로 신민헌을 두었으나, 공사 문헌이 없어 누가 창건하고 누가 수리하였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1738년 부사로 부임한 송징태가 관아를 중창하였다. 송징태가 부임할 당시 동헌은 비가 새고 더러워 거처할 수 없고, 외문은 2칸, 중랑(中郎)은 6~7칸 규모였다. 음식을 장만하고 식사를 하는 공수(公須) 역시 기울어진 상태였다. 재정적 이유로 먼저 공수 8칸을 지었다. 1739년 봄 문루를 신축하고 중랑 3칸과 공고 21칸을 새로 지었다. 1740년 동헌을 헐고 그 터에 15칸 규모의 동헌을 새로 지었다. 1741년(영조 17) 별당인 송백당을 지었다. 그 외 부사의 마방 등 건물을 수리하였다. 1812년(순조 12) 부사 윤희(尹爔)가 중수하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청송군이 된 뒤 1906년 군수 안종덕이 중수하였다.

연식당은 수령의 가족이 머무르는 공간이다. 『여지도서』와 『청송부읍지』에 따르면 수고정은 1579년 부사 고경허(高景虛)가 건립하고, 퇴계 이황이 편액하였다고 한다. 이황은 1570년 임종하였으므로 1579년 건립된 건물을 편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황이 편액하였다면 1579년은 건립이 아닌 중수로 짐작된다. 1707년 부사 이세성(李世晟)이 중수 및 단청을 하였다. 송백당은 신민헌 동쪽의 정사이다. 1741년 부사 송징태가 관아 북쪽에 건립하였다. 자료의 소략으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이 밖에 관아 건물로는 향사당, 장관청, 강무당, 인리청, 군관청, 군자창 등이 있었다.

[청송도호부 사람들]

청송도호부에는 종3품 도호부사(都護府使)가 파견되어 지역의 행정·군사·민생 업무를 총괄하였다. 1460년 서혼(徐混)이 도호부사로 첫 부임하여 마지막 신관조(申觀朝) 도호부사까지 총 202명이 재임하였다. 평균 재임기간은 25개월이다.

역대 청송도호부사는 서혼, 최상유(崔尙柔), 이신(李晨), 유혼(柳渾), 홍성망(洪性網), 민성(閔誠), 권치중(權致中), 윤해(尹垓), 임숙(任淑), 설무림(薛茂林), 이거인(李居仁), 조금(趙嶔), 최한후(崔漢侯), 이승녕(李承寧), 유양춘(柳陽春), 심순도(沈順道), 정붕(鄭鵬), 배익신(裵益臣), 송징(宋徵), 권오기(權五紀), 이득전(李得全), 홍수(洪脩), 김량언(金良彦), 유중익(兪仲翼), 장세필(張世弼), 조림(趙琳), 정편(鄭遍), 금의(琴椅), 이경장(李敬長), 장한보(張漢輔), 이중량(李中樑), 김취문(金就文), 장응선(張應璇), 이영(李榮), 권용(權鎔), 서극일(徐克一), 곽규(郭赳), 변영청(邊永淸), 유세무(柳世茂), 고경허(高景虛), 곽월(郭越), 김우굉(金宇宏), 이광준(李光俊), 정인귀(鄭仁貴), 정신(鄭愼), 박유인(朴惟仁), 김홍미(金弘微), 권춘란(權春蘭), 황시(黃是), 성대업(成大業), 황치성(黃致誠), 이영도(李詠道), 강부성(康復誠), 박이장(朴而章), 오운(吳澐), 허민(許旻), 오여벌(吳汝橃), 이성(李晟), 이유경(李有慶), 정언굉(鄭彦宏), 이구징(李久澄), 허항(許恒), 최산휘(崔山輝), 강홍중(姜弘重), 이현(李俔), 양극선(梁克選), 조희진(趙希進), 최욱(崔煜), 최유연(崔有淵), 이후석(李後奭), 신량(申湸), 이이현(李㶊賢), 김진표(金震標), 박순의(朴純義), 김삼락(金三樂), 김선영(金善英), 이행원(李行源), 김정하(金鼎夏), 구음(具崟), 이정(李晶), 조익강(趙益剛), 이운림(李雲林), 이민장(李敏章), 김홍경(金洪慶), 이세무(李世茂), 이동명(李東溟), 이인환(李寅煥), 강세구(姜世龜), 유하겸(兪夏謙), 이광벽(李光壁), 이문징(李文徵), 홍주진(洪柱震), 이상훈(李相勛), 강석신(姜碩臣), 서문징(徐文徵), 이세성(李世晟), 이언유(李彦維), 조정만(趙正萬), 이광조(李光朝), 이민영(李敏英), 성환(成瑍), 김시보(金時保), 송징규(宋徵奎), 심봉휘(沈鳳輝), 윤빈(尹彬), 박사한(朴師漢), 홍중기(洪重耆), 윤휘정(尹彙貞), 송징태(宋徵泰), 정석범(鄭錫範), 유직기(兪直基), 이규보(李珪輔), 서유상(徐有常), 윤동함(尹東涵), 조덕수(趙德洙), 유언국(兪彦國), 유건(柳建), 윤방(尹坊), 이덕기(李德基), 어석정(魚錫定), 정충달(鄭忠達), 이치중(李致中), 신대관(申大觀), 민종렬(閔鍾烈), 심관(沈鑧), 윤면승(尹勉升), 서회수(徐晦修), 이세석(李世奭), 정언진(鄭彦暹), 임시철(林蓍喆), 임희교(任希敎), 정계순(鄭啓淳), 강유(姜游), 이제만(李濟萬), 신광리(申光履), 한광근(韓光近), 조윤정(曺允精), 이보천(李普天), 홍언철(洪彦喆), 홍의호(洪義浩), 유한모(兪漢謨), 홍수호(洪受浩), 이면제(李勉齊), 김효건(金孝建), 윤제동(尹悌東), 이덕현(李德鉉), 최광태(崔光泰), 이재기(李在璣), 정동간(鄭東榦), 이석(李鉐), 강휘옥(姜彙鈺), 윤희(尹爔), 장한(張澣), 윤일규(尹日逵), 심능식(沈能栻), 윤경진(尹景鎭), 김초순(金初淳), 이덕수(李德秀), 황경언(黃儆彦), 홍직모(洪稷謨), 성근묵(成近默), 이탁원(李鐸遠), 이현호(李玄好), 김기명(金箕明), 김진화(金鎭華), 이병두(李柄斗), 이조식(李祖植), 박증수(朴曾壽), 임태수(林泰洙), 유치홍(兪致弘), 조연천(趙然天), 홍우신(洪祐信), 조병목(趙秉穆), 박규현(朴奎賢), 엄석겸(嚴錫謙), 오기묵(吳基默), 정경조(鄭慶朝), 윤기일(尹夔一), 남희중(南羲重), 이달영(李達永), 최익봉(崔翼鳳), 심낙정(沈樂正), 윤현기(尹顯岐), 조병필(趙秉弼), 윤영선(尹永善), 유교조(柳敎祚), 정현영(鄭顯英), 이문현(李文鉉), 이계하(李啓夏), 박세병(朴世秉), 이승희(李承喜), 이교영(李敎英), 조백승(曺柏承), 박제보(朴齊普), 신관조(申觀朝)이다.

이 밖에 『청송부읍지』를 보면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2인, 군관(軍官) 25인, 인리(人吏) 40인, 지인(知印) 15인, 관노(官奴) 14인, 사령(使令) 15인, 관비(官婢) 13인 등이 청송도호부를 구성하였음이 나타난다.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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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8 행정지명 현행화 부동면 -> 부동면[현 주왕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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