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568 |
---|---|
한자 | 白時耉 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Baeksigu Memorial Ston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1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원미경 |
건립 시기/일시 | 1786년 - 백시구 신도비 건립 |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649년 - 백시구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722년 - 백시구 사망 |
현 소재지 | 백시구 신도비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드르니마을 |
성격 | 비 |
양식 | 비좌개석(碑座蓋石)형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331㎝[전체 높이]|208㎝[비석 높이]|88㎝[폭]|35㎝[두께] |
[정의]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무신 백시구의 신도비.
[개설]
백시구(白時耈)[1649~1722]는 조선 후기 무신(武臣)으로 본관은 수원, 자는 덕로(德老),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아버지는 원진(元振)이다. 1680년(숙종 6) 무과에 급제하였고, 1684년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북로(北路)의 봉수(烽燧)를 조사하여 허술한 곳을 수축하게 하였다. 이어 초계군수(草溪郡守)가 되어서는 교육 정책에 힘썼고, 1708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717년(숙종 43) 함경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절도사로 있을 때 군기(軍器)들을 잘 수선하고 병사들 훈련에 힘써 국방에 주력하였다. 경종이 즉위하고 김일경(金一鏡) 등이 정권을 잡자 노론의 구신(舊臣)들을 몰아낼 때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기로소(耆老所)에 백금을 빌려준 일이 있는데 이 일로 반대파에 의해 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았다. 김일경 등에 의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날 때 김창집(金昌集)의 죄상을 조작하려 하자 백시구는 심문에 단호히 불복하였다. 결국 고문에 못 이겨 옥사하였다. 1741년(영조 17) 탕평책을 써서 백시구의 관직을 복구하고 몰수하였던 재산도 후손에게 돌려주었으며 호조판서를 추증하였다. 1786년(정조 10)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에 백시구 신도비(白時耉 神道碑)가 건립되었다.
[위치]
백시구 신도비는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지포리 신철원중학교를 지나 군탄1리 드르니마을로 들어가면 민가 길 옆[후손 백금현(白金賢) 자택 앞] 에 있다. 백시구 묘소는 백금현의 목장 뒷산에 있다.
[형태]
백시구 신도비는 비의 머리 부분에 개석을 씌운 비좌개석(碑座蓋石) 형태로, 개석은 팔작지붕이고 대석은 문양이 없이 단조롭다. 전체 높이는 331㎝이고, 비석의 높이는 208㎝이다. 폭은 88㎝, 두께는 35㎝이며 모두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금석문]
백시구 신도비에는 ‘증호조판서 행평안도병마절도사 증시충장 백공신도비명(贈戶曹判書行平安道兵馬節度使贈諡忠莊白公神道碑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종수(金鍾秀)가 찬(撰)하고 서유린(徐有隣)이 쓰고 김익(金熤)이 새겼다.
[현황]
백시구 신도비는 비의 마멸 상태는 양호하나 총탄 흔적이 앞면에 20여 곳, 왼쪽 면에 4곳, 오른쪽 면에 7곳 남아 있다. 백시구의 묘소는 정부인 광주김씨와 합장하였고 상석, 향로석, 족석, 혼유석, 계체석, 망주석이 있다.
[의의와 평가]
백시구 신도비는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1리 드르니 마을에 오래전부터 세거하였던 수원백씨의 대표적인 조상 백시구의 신도비로 마을 주민들이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