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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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應簾 |
영어공식명칭 | Im Eungryum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원희 |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철원 출신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임응렴(林應簾)[1900~1940]은 1900년 강원도 철원군 인목면 도밀리[현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밀리]에서 태어났다. 철원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0일 철원읍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뒤 철원의 천도교인들은 최병훈(崔炳勳)이 평강(平康) 천도교 대교구에서 가져온 「3·1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군내에 배포하고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주모자 11명이 검거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감리교 목사인 박연서(朴淵瑞)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계열이 주축이 되어 3월 10일에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0일의 철원읍 3·1운동은 철원농업학교와 철원보통학교의 학생들, 기독교인과 지역 청년의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철원농업학교의 박용철(朴容喆)·이해종(李海鍾)과 철원보통학교의 임응렴·이규정(李圭貞)이 주도하였다. 시위 당일 북간산(北看山)에 집결한 205여 명의 학생들은 옥양목으로 미리 만들어 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철원군청에서 시위대와 합류하였고, 1,000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군청 직원들을 위협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였고, 저녁에는 월하리(月下里)에 있는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의 집으로 몰려가서 박의병으로 하여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튿날인 3월 11일에도 시위가 계속되어 서문거리에 모였던 시위 군중은 철원역으로 향하였다. 임응렴도 철원역에 모인 700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고, 191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과 벌금 20원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0년 3월 1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한민국 정부는 임응렴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