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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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寧海朴氏門中傳說 |
영어공식명칭 | The Legend of the Younghae Park Famil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현대/현대 |
집필자 | 박현숙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3년 11월 30일 - 「영해박씨 문중 전설」 박재연[남, 81세]에게서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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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5년 - 「영해박씨 문중 전설」 강원도에서 발행한 『강원의 설화』에 수록 |
관련 지명 | 원동면 - 강원도 철원군 원동면 |
채록지 | 문혜리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 |
성격 | 설화|인물 전설 |
모티프 유형 | 명당 차지 |
[정의]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에서 영해박씨가 김화읍에 입촌하여 정착한 내력과 관련하여 전하여지는 이야기.
[개설]
「영해박씨 문중 전설」은 영해박씨(寧海朴氏) 박창령(朴昌齡)의 운구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에서 멈추자 거기에 묘를 써서 자손들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영해박씨 문중 전설」은 2003년 11월 30일에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에서 박재연[남, 81세]에게서 채록하였다. 「영해박씨 문중 전설」은 2005년에 강원도에서 발행한 『강원의 설화』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대목장(大木匠) 박창령은 함경도 여흥에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사당을 지었는데, 쥐나 뱀이 땅을 파면 사당이 넘어가기 때문에 방비를 하기 위하여 서고황으로 주춧돌을 놓았다. 그 후 평양서윤(平壤庶尹)이 되었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가족들이 박창령의 시신을 고향 영해로 운구할 때의 일이다. 강원도 철원군 원동면을 지나는데 명정(銘旌)이 멈추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박창령의 아들과 운구하는 사람들이 의논하다가 종두가 근처에 좋은 묏자리가 있다고 하여 거기에 묘를 쓰기로 했다. 제보자인 박재연의 할아버지가 박창령의 묘가 있는 김화에 입촌하여 묘를 관리하였다. 박창령은 구은사(九隱士)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과 정재(靜齋) 조상치(曺尙治)를 가르쳤다. 단종(端宗)[1441~1457]이 죽자 단종 복위를 위한 모임의 명분이 없어져 구은사는 뿔뿔이 흩어졌다. 조상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김시습은 자유로운 방랑자가 되었으며, 박창령의 둘째 아들은 친구들이 있는 여흥으로, 셋째 아들은 평양으로 갔다.
[모티프 분석]
「영해박씨 문중 전설」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 차지’이다. 명당에 묏자리를 잡은 박창령의 인물됨을 강조하는 이야기이다. 박창령이 이성계의 사당을 짓고, 김시습과 조상치를 가르친 인물이라는 설명은 박창령이 명당을 차지할 만한 인물임을 드러내는 요소이다. 명정이 멈추어 명당을 잡았다는 신이한 일이 서사에서 강조되는 것은 박창령의 묏자리가 하늘이 내린 자리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