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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61
한자 自衛隊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9년 1월연표보기 - 자위대 결성
성격 사건|사고|사회운동

[정의]

개항기 대구광역시에서 경상감영 객사 철거에 반대하기 위하여 결성된 조직.

[설립 목적]

자위대(自衛隊)는 1908년 말 경상북도 관찰부가 대구공소원[기관]을 건축하기 위하여 경상감영 객사를 철거하겠다고 하고, 대구일본거류민단 또한 객사를 철거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며 경상감영 객사를 지킬 목적으로 1909년 1월 대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조직이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설치된 이후 조선시대 영남 지역 행정의 중심이었던 경상감영은 대구 사람들에게 대구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곳이었다. 경상감영 객사는 중앙 건물인 달성관과 좌우에 팔달헌과 대슬헌, 주흘원 등의 건물이 있었다. 관리들이 머물거나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공간이었던 경상감영 객사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 경축일에 지방 수령이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며 임금을 가까이 모신다는 상징적 의미도 담고 있었다. 또한 외빈(外賓)의 숙소로 사용되어 영빈관 기능도 하였으며, 연회도 베풀던 곳이었다.

당시 경상감영 객사의 풍광에 대하여서는 1888년 대구를 찾은 프랑스의 여행가이자 민속학자 샤를 바라가 저술한 『조선기행』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규모에서 압도적인 것이 방금 내가 나온 영빈관 건물인데, 다채로운 색깔이 돋보이는 그 지붕 꼭대기에는 거대한 붉은 깃발이 도시 전체를 굽어보며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자위대는 대구의 곳곳에 “객사를 파괴하려는 민단을 우리 모두 일어나서 저지하자”라는 격문을 붙였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횃불을 든 채 경상감영 객사를 지키며 반대 농성을 벌였다. 또한 자위대는 「중양타령」을 만들어 경상북도관찰사 박중양경상감영 객사 철거를 비난하였다.

“중양가절 말 말아라. 통곡일세 통곡일세, 누백 년을 존숭하던 대구객사 어데 갔노. 애구 대구 흥. 중양가절 말 말아라. 어이할고 어이할고. 대성 지성 부자묘는 탄토 중에 들었고나. 애구 대구 흥. 중양가절 말 말아라. 전무후기 비기수단 대구 성곽 구공해를 일 시간에 팔아먹네. 애구 흥. 중양가절 말 말아라. 떠나갔네 떠나갔네 협성학교 떠나갔네. 일도(一道) 청년 어이할고. 애구 대구 흥“

자위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일본군 대구 수비대 1개 대대를 동원하여 강제로 농성을 해산시킨 다음 끝내 경상감영 객사를 허물어 버렸다. 경상감영 객사 터와 주변 민가 주변에 도로가 설치되어 중구 대안동에서 중구 북성로에 이르는 길이 생겼다.

[의의와 평가]

자위대는 일제의 대구 침탈과 친일 관료 박중양경상감영 객사 철거에 맞선 대구 지역 민중의 반외세 항거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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