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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1719
한자 梵日-崛山寺址
영어음역 Beomilgwa Gulsansaji
영어의미역 National Preceptor Beomil and Gulsansaji Archeological Site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이상수

[정의]

범일(梵日)사굴산문(闍堀山門)의 본산인 굴산사(屈山寺)를 창건한 신라시대 선승(禪僧), 굴산사지(屈山寺址)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있었던 굴산사(崛山寺)의 옛 절터.

[개설]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는 굴산사지가 있다. 창건연대와 연혁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범일이 입당구법(入唐求法)한 후 귀국하여 851년(문성왕 13) 명주도독 김공(金公)의 청을 받아 굴산사 주지로 오게 된 해를 창건연대로 삼은 견해가 있다. 범일이 주지가 됨을 계기로, 굴산사는 신라 9산선문의 일파를 이루어 이른바 사굴산파(闍堀山派) 혹은 굴산파(堀山派)를 형성하게 되었다.

사굴산파는 범일을 개조(開祖)로, 굴산사를 중심도량인 선문(禪門)으로 하여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영동 지방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더욱이 범일의 선학이념(禪學理念)은 그가 입적한 이후 고려시대에도 계속 이어져 전국적으로 발전·확대되어갔으며, 오늘날 불교의 정맥(正脈)이라 할 조계종으로 이어지고 있다. 굴산사를 중심도량으로 형성된 사굴산파는 영동 지방 지방 세력의 사상적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범일은 오늘날 국사성황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런데 어떤 과정을 거쳐 실존인물인 범일이 국사성황신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또 실존인물이었던 범일국사가 과연 국사성황신이었는지도 실은 100퍼센트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범일국사가 국사성황신으로 추앙받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아버지 없는 아이에서 국사가 되기까지]

범일의 행적을 살필 만한 자료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조당집(祖堂集)』·기타 금석문(金石文) 등에 단편적인 자료들이 있는 정도다. 물론 범일이 9세기 중반에서 9세기 말까지 굴산선문의 개조로서 영동의 지방 세력과의 관계에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범일의 위치는 또 다른 인물과의 연관성 아래에서 보아야 한다. 범일의 조부가 구림관족(鳩林冠族)으로서 범일이 태어날 무렵 명주도독(溟州都督)이었다는 점, 또 범일이 41세 되던 해에 굴산사 주지로 와 달라는 청을 한 인물도 역시 명주도독이었다는 점을 연결시켜 볼 때, 범일의 존재는 그가 태어나기 25년 전 왕위에서 밀려난 김주원(金周元)과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할 여지를 담고 있다.

범일의 대체적인 인적사항을 알게 해주는 자료가 『조당집(祖堂集)』이다. 『조당집(祖堂集)』에 의하면, 범일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 가계는 구림관족(鳩林冠族)이다. 조부는 명주도독 겸 평찰(平察)을 지낸 술원(述元). 아버지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머니는 문씨(文氏)인데 강릉에 세거(世居)한 호문(豪門) 출신이다. 범일은 810년(헌덕왕 2) 정월 10일 강릉에서 태어나 889년(진성여왕 3) 5월 1일 강릉 굴산사에서 입적하였다.

범일의 승력(僧歷)에 관하여 『조당집(祖堂集)』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용모에서 숙명적으로 불교와 인과(因果)를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발수자(螺髻殊姿)[머리카락이 한 올씩 오른쪽으로 소라껍질처럼 말린 석가모니의 머리모양처럼 특별한 모습]’라든지 ‘정주이상(頂珠異相)[석가모니의 정수리 위로 살이 솟은 모양으로 지혜를 상징하는 모습]’이라는 표현이 그렇다. 범일이 15세에 서원출가(誓願出家)를 부모에게 고하자, 부모들은 숙연선과(宿緣善果)[지난 세상에서부터 맺은 인연과 좋은 삶의 결과]로 불가탈지(不可奪志)[승려가 되겠다는 의지를 말릴 수 없다는 의미]했다는 것이고, 이로써 산에 들어가 수도하게 되었고, 20세에 경사(京師)[즉 경주]에 이르러 구족계(具足戒)[불교에서 출가(出家)한 비구·비구니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고 했다.

그 후 범일은 827~835년(흥덕왕 2~10)에 왕자인 김의종(金義琮)을 따라 입당(入唐)하였다고 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가 836년(흥덕왕 11)조에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 시기는 흥덕왕 11년이었음이 분명하다.

당나라에 간 범일은 염관 제안대사(鹽官 濟安大師)에게 6년 동안 수련하다가 이후 약산(藥山)[즉 유엄대사(惟儼大師)]과 교유하고, 이어 승지(勝地)를 돌아다니며 수도를 계속했다. 회창(會昌) 4년(844) 7월 당 무종(武宗)의 칙령으로 승려의 탄압[환속]과 불우(佛宇)를 훼철(毁撤)하는 폐불사건(廢佛事件)[845년에 이어짐]이 일어나 몸을 숨기려고 동분서주하였다 한다. 상산(商山)에서 독거선정(獨居禪定)하던 중 반년 후에 간신히 소주(韶州)의 조사탑(祖師塔)[중국 선종의 육조인 혜능선사의 탑]을 예배하였다. 그 후 회창(會昌) 7년(847) 정묘 8월에 귀국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머물며 수도하다가, 대중(大中) 5년(851) 정월에 백달산(白達山)[충남 대덕군 회덕면 소재]에서 안좌(宴坐)하던 중 당시 명주도독 김공(金公)이 굴산사(掘山寺) 주지로 청하여 굴산사에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40여 년간 불법을 전하였다.

선종은 직지인심(直指人心)·심심상인(心心相印) 등으로 표현되는 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깨달음의 직접적 전수를 강조하였다. 이는 중국인의 사회윤리에서 군신(君臣)·부자(父子) 등 종적(縱的) 질서를 강조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9세기 이후 고승들은 주로 남중국에 유학하여 남종선(南宗禪)을 계승하였다. 남종선은 당나라 말 지방 세력이 등장하는 시기에 유행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유학한 선승들이 귀국하여 신라 말 지방사회에 많은 산사(山寺)를 형성하게 하였다. 범일은 당나라에서 귀국(847, 문성왕 9)하여 문성왕 13년(851) 정월까지 백달산에 안좌하다가 강릉 굴산사에 오게 되었다.

선종이 신라 사회에 하나의 사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9세기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중앙 정치세력이 분열되고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불교계의 통제 역시 약화되자, 선종이 지방 불교로써 지방호족의 난립을 뒷받침하는 혼란기의 사상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범일에 의한 굴산사를 중심으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굴산선문(掘山禪門)·사굴산파(闍崛山派)가 형성되었다.

굴산선문이 개창된 이래 범일의 문하에서 많은 문도들이 배출되었다. 범일의 문하에서는 개청(開淸)·행적(行寂)·두타 신의(頭陀信義)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에 대한 자료로는,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보현사(普賢寺)에 소재하는 개청낭원대사오진탑비(郞圓大師悟眞塔碑)와 경북 봉화군 태자사(太子寺)에 소재하는 행적의 낭원대사백월첩운탑비(郞空大師白月捷雲塔碑)를 통해 알 수 있다.

개청은 속성(俗姓)이 김씨고, 계림관족(鷄林冠族)이다. 문성왕 16년(854)에 태어나 관년(冠年)에 출가, 화엄산사(華嚴山寺) 정행(淨行)에게 문도(聞道)하고, 강주(康州)[지금의 진주(晋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계를 받았다. 금산(錦山)에서 3년간 식송근수(食松勤修)하다가 “굴산(掘山)으로 가면 출세신인(出世神人)이 있다”는 한 노인의 신고(神告)를 듣고 굴산사 범일법사를 찾아가 예를 갖추었다. 이때 법사는 “오기가 어찌 이리 늦은가. 오랜 시간을 기다렸노라.” 하고, 입실(入室)을 허락했다. 이후 그에게 법이 사승(嗣承)되었다.

그는 범일 입적 후 보현사(普賢寺)에 입주하여 굴산의 종풍을 크게 떨쳐, 경애왕의 국사가 되고 930년(경순왕 4)에 입적하였다. 세수(世壽) 96세였다. 고려 태조개청에게 시호를 낭원(郞圓), 탑(塔)은 ‘오진(悟眞)’이라 증호(贈號)했다. 개청의 문하에 신경(神鏡)·총정(聰靜)·월정(越晶)·환언(奐言)·혜지(惠如) 등 수백 인이 있어 법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행적은 하남(河南)[지금의 하동(河東)] 사람으로, 속성은 최씨다. 832년(흥덕왕 7)에 태어나 일찍이 출가하여 해인사에서 화엄을 배웠다. 그 후 문성왕 17년(855)에 복천사(福泉寺)에서 계를 받고 이후 오대산의 굴산 범일대사에 참례하고 그에게 입실하였다. 경문왕 10년(870)에 당에 들어가 중국 오대산 화엄사에서 문수(文殊)를 뵙고 석상경제(石霜慶諸)의 심인(心印)을 얻었다. 헌강왕 10년(884)에 귀국하여 삭주(朔州)[지금의 춘천] 건자암(建子庵)에 머무르며 사법(師法)을 개진(開振)하니 그 법이 크게 떨쳤다. 효공왕이 스승으로 예우하였다. 889년(진성왕 3) 범일이 병으로 앓아누우니 급히 굴산으로 돌아가 정근시질(精勤侍疾)하였다. 범일이 입적하기에 이르자, 행적에게 전심(傳心)을 부촉(咐囑)[부탁하여 위촉함]하였다. 이후 사법(師法)을 전승하여 종풍을 크게 떨치다가 915년(신덕왕 4) 세수 85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를 낭공(郞空), 탑(塔)을 ‘백월첩운(白月捷雲)’이라 하였다. 문하에 신종(信宗)·주해(周解)·임엄(林儼)·양경(讓景) 등 500여 인이 있어 문풍(門風)을 전승하였다.

범일의 탄생에 대해서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은 강릉단오제의 국사성황신[범일의 신격화] 설화에서도 다루었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양가의 처녀가 굴산(掘山)[지금의 학산]에 살고 있었다. 나이가 차도록 시집을 못 가고 있었다. 처녀가 석천에 물을 길러 갔다가 표주박에 햇볕이 유난히 비쳐오는 것을 보았다. 별 생각 없이 그 물을 마셨다. 그 후 날이 갈수록 배가 달라지더니 14삭 만에 뜻하지 않게 옥동자를 낳았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은 처녀의 놀라움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부모들 역시 황망해하며 집을 그르치고 망신시킬 변고라 하였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나머지 젖 한 번 빨리지 못하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바위 밑에 내버렸다.

사흘 뒤 어머니는 버린 아이가 궁금하고 마음이 아파서 아침 일찍 바위에 가 보았다. 죄 없는 어린 생명을 죽이기에는 어미 된 이의 마음이 따가웠던 것이다. 그런데 죽었어야 할 아이가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이에 놀란 어머니는 하룻밤을 새워가면서 아이의 주위를 살피면서 눈 속에서 밤을 새워 기다렸다. 자정이 되어갈 무렵, 난데없이 백학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두 날개로 아이를 깔고 덮어 주면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새벽이 되자 백학은 자리를 정돈해 놓고 아이 입에 단실(丹實) 세 알을 넣어 주고는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생각할 수도 없는 기묘하고 신비스러운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본 어머니는 이상한 생각이 들면서 어안이 벙벙해져 돌아왔다. 그 다음날도 계속 지켜보았으나 아이는 제대로 자라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집안에서도 알게 되었다.

아이가 범상치 않음을 안 집안에서는 아이를 버리면 죄가 될까 두려워 다시 데려와 기르게 되었다. 아이는 아비 없는 자식이란 조롱과 학대를 받으면서 4, 5세 될 때까지 별 탈 없이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어머니를 향해 조용히 꿇어앉아 절하고 물었다. ‘나는 정말 아버지가 없습니까?’ 어머니는 어쩔 도리가 없어 전후의 사실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말을 듣고 난 아이가 어머니 앞에 절하고 하는 말이 ‘불초자는 어머니를 위하여 반드시 큰 사람이 되어 돌아올 것이니 근심하거나 저를 찾지 마십시오.’라고 하고는 모자가 서로 이별하였다. 그 후 아이는 국사(國師)라는 승가의 최고 자리에 이르러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굴산사를 세웠다고 한다. 학이 아이를 기른 바위를 이름 하여 ‘학바위’라 하고, 아이 이름을 범일국사라고 했다.

[지역 호족과 성황신의 탄생]

범일국사는 강릉 지역에서 국사성황신으로 숭앙받고 있다. 말의 의미로 보자면 국사성황신은 국사(國師)와 성황신(城隍神)의 합성어이다. 국사는 승려에게 부여되는 승계(僧階)에 따른 최고의 승직이며, 성황신은 성황제의 신위(神位)를 의미한다. 이 국사성황신에서 국사는 범일선사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현재 영동 지방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며, 연구자들도 이러한 점을 별다른 검증 없이 수용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국사를 국수(國帥)로 해석하여 별개로 보려는 시각이 있으나, 이 또한 논리적 검증이 결여된 선언적 주장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국사성황제의 주신(主神)을 국사성황신으로 본다면 그 신위는 과연 인격신으로서의 범일국사인가? 이 문제는 제의의 사회적 의미가 그 주신의 상징성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한 가지 형상에 다양한 의미가 습합될 수 있다는 민속학적 시각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함으로써 분명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다’는 견해가 표준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별도의 논의의 장은 마련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이러한 표준적 인식이 과연 적합한지를 살펴보고 그로부터 국사성황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단서를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범일선사가 성황제의 주신일 수 있다면, 그것은 범일선사가 신격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신격화의 시기는 범일선사가 입적한 이후로 설정될 것이고, 아울러 당시 사회변화의 연장선상에서 이 현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당시 명주 지방의 사회변화를 주도하였던 명주의 호족 층이 국사성황신을 설정하는 주체로 상정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국사성황제가 마을이 아닌 일향(一鄕)을 단위로 치제(致祭)되는 성황제라는 점에서 당시 일향의 주도세력인 명주 호족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점도 이 생각의 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범일선사의 입적(入寂) 이후 명주 지방의 상황을 주목해 본다. 범일선사는 889년에 입적하였고 이 지방에서 그의 심인(心印)은 낭원대사(朗圓大師)로 승계되고 있다. 이 시기의 굴산문과 명주 호족과의 관계는 낭원대사와 명주장군 김순식(金順式)의 단월(檀越)[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절이나 스님에게 물건을 베풀어 주는 일로서 시주와 같은 의미이다. 절이나 스님에게 재물을 베푸는 것은 ‘재시’라하고, 그 대가로 절이나 스님이 불법을 베풀어 주는 것은 ‘법시’라고 한다.] 관계로 파악되고 있다. 즉 낭원대사를 중심으로 하는 굴산문과 명주장군 김순식을 중심인물로 하는 명주 호족의 관계인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범일선사와 명주 호족의 관계가 다음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명주 호족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명주의 호족은 894년 후고구려의 궁예(弓裔) 세력에 귀의(歸依)하였고, 후고구려의 권력 변동에 따라 920년경에는 고려의 왕건(王建) 세력에 귀의하였다. 명주 호족과 고려 왕건 세력과의 연대관계는 출병(出兵)과 혼인(婚姻) 그리고 사성(賜姓)의 형태로 정리된다. 구체적으로 보면, 명주 호족은 960년 일리천(一利天) 전투에 출병하여 고려의 왕건을 지원하였고, 고려는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통일 이후 명주 호족은 고려 조정에 출사할 수 있었고, 명주는 고려의 첫 행정 개편에서 동원경(東原京)으로 읍호가 승격되었다. 명주 호족의 출병은 통일에 공헌하는 명분을 갖는 것이었으며, 출사와 읍호 승격의 명분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비록 선후관계가 분명치는 않지만 혼인과 사성도 함께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건립된 객사는 읍호의 승격으로 규정되는 지방사회 발전에 대한 기념비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변화에서 국사성황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바로 이 명주 호족의 출병이었다.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대관령을 배경으로 설정되는 명주장군 김순식의 꿈 이야기는 국사성황제의 치제를 낳은 모티브라는 의미가 있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강릉 지방의 읍지인 『임영지(臨瀛志)』에서 이 꿈 이야기는 국사성황제의 치제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으로 주목되고 있다.

명주 호족의 명운을 건 출정에서 꿈 이야기의 배경으로 설정되는 대관령에서의 치제는 출병의 당위성을 확인하여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지방 사회의 동요를 제어하고 승전을 염원하는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치제와 맞물린 꿈 이야기에서 출정을 선도하는 신비의 인물 즉 인격신이 설정되고 있다. 인격신은 적어도 출정의 당위성을 확보하고 사회적 동요를 억제하는 역할을 담보하고 있다고 할 것이고,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인물로서 입적한 범일선사를 주목할 개연성이 있다. 즉 출정을 결정하였던 명주 호족의 정체성과 그에 따르는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있어 범일선사의 구심적 역할이 인정되고, 정토신앙이 유포되면서 범일선사의 이미지는 민중 일반에게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이상의 상황을 감안할 때, 명주 호족의 출정을 배경으로 국사성황제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으며 나말여초(羅末麗初)에 대관령에서 연행되는 국사성황제의 치제 주체는 명주 호족이었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국사성황신은 인격신으로서 범일선사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의미는 명주 호족의 치적과 맞물린 지방사회 발전을 담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국사성황제의 치제 주체를 명주 호족으로 이해할 때, 국사성황제는 연례적인 치제로 발전할 수 있는 소지가 생긴다. 즉 출정의 당위성과 승전을 염원하였던 치제에서 이제 승전을 감사하고 새로이 지방 사회의 발전을 염원하는 치제로 발전되는 것이다. 더욱이 승전을 계기로 지방 사회의 지배세력으로서 명주 호족의 입지는 여전히 인정될 수 있고,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주도하는 치제는 자신들의 역할과 성과를 기념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로서 국사성황제는 명주 호족과 그 후예들의 사회적 입지를 재생산하는 기제라는 성격을 띠며, 이러한 성격에 힘입어 국사성황제가 연례적인 치제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파악되는 명주 지방의 토성(土姓)이 명주 호족의 후예로 이해되고 있으며, 나말여초의 사성(四姓)이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이르기까지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뒷받침된다. 즉 명주 호족과 그 후예들이 고려시대 전 기간 동안 여전히 명주 지방의 지배 세력이었으며, 국사성황제는 고려시대 내내 치제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범일선사의 법맥을 잇는 아미타존불도와 미타계의 자료에서 고려시대의 향도계가 지방사회 지배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점도 명주 호족의 후예들이 여전히 이 지역의 지배세력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국사성황제의 연례적인 치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제의학파에 의하면 인간은 행동을 먼저 한 후에 그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고 한다. 제의(祭儀)가 신화(神話)보다 먼저 존재했으며 신화의 서사는 직접 행위로 보여 주는 제의의 간접적인 해석이라는 견해다. 삶의 갈등을 해소하여 인간다운 삶을 이루려는 욕망이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 제의이며, 그것이 말로 표현된 것이 신화라는 것이다.

강릉단오 또한 이러한 견해가 타당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는 스님이 꿈속에서 태조를 도운 것과 그 스님을 모신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왕순식의 진술이 있다. 그러나 이 스님이 범일이라는 단서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에 의거하여 후대에 범일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으며 지역 주민의 의식을 담아내는 신화적 전설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관령’이라는 공간은 지리적, 풍수적, 군사적 의미에서 강릉 지역 주민들의 주목을 받는 곳이다. 그렇다면 대관령은 이미 『고려사(高麗史)』의 기록 이전에 국가차원의 제의 또는 부락단위의 치제(致祭)가 이루어졌던 공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후 고려 태조대관령과의 관계 때문에 이곳은 지역 주민들에게 더욱더 신성한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제의 속에 범일국사라는 인격신의 출현과 이를 신성하게 여기는 신화적 전설의 탄생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자료로 무가의 한 대목을 보자.

군웅굿을 들리기 전에 이 지방의 산신님이신 김유신 장군의 군웅굿을 비옵나이다. 김유신 장군님 난데 본은 충청도 만노군이 난데 본이요 유신 장군님은 신라의 명장이며 충청도 만노군, 충청북도 진천읍의 태수 김서현 태수와 그 부인 만명 부인 사이에서 회태하여 태어나셨으니 장군님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글을 배우니 한 자를 가리키면 열 자를 알고 하는지라 인품이 예사롭지 아니하며 총명 신기하니 궁술로 활을 당기니 활살이 백발 오관중이 분명하다. 이렇게 성장하여 문무 겸하니 나라에 큰 기둥이로다 나라에서 부르시니 나라에 충성하고 퇴절하여 집에 이르니 부모에 효도로다 큰 벼슬이 몸에 입혀지니 대장군이 완연하다. 이 분이 바로 유명하신 김유신 장군님이올시다. 장군님은 천운의 뜻을 품고 태백산에 입산하여 흑마 백마 갈아타시고 병법을 연마하며 대관령에 당도하니 그 경치가 절경이로다. 초목무성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은지라 첩첩산중이 분명하다. 대관령 중턱에 당도하니 거기에 한 분의 백발노인이 계신지라. 이 분이 바로 범일국사이시며 이때부터 두 분이 알게 되었고 두 분은 무예와 무술을 연마하며 병법을 형통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니 과연 대장군일세, 군웅장군일세. 훗날에 장군님이 세상을 하직하니 사람들은 그 분을 이르기를 흑마대왕이라 칭하시고 사후에 대관령 산신님이 되셨다하오니 우리 고장의 수호신이며 어찌 군웅장군이 아니라 할손가.’

이 무가에서는 대관령에 이미 범일이 신으로 좌정해 있었음을 시사하면서도 범일 이후에 김유신의 좌정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범일국사의 대관령산신이라는 지위는 관념적이고 사변론적인 입장의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은 무장 출신 김유신으로 교체되었을 수 있겠다. 범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제의에 유교 정치이념을 내세운 지방 관료들이 깊숙하게 개입했고, 이후 대관령 산신으로 김유신이 좌정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지역민들의 제의에 대한 참여의지가 지속적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대관령산신은 김유신으로, 대관령서낭신은 범일국사로 이동 좌정하지 않았을까 한다. 또한 대관령여국사서낭신의 인격화도 이러한 과정에서 지역의 제의와 습합되어 지역 출신 인물로 설화를 만들고 신으로 상정되어 좌정시킨 결과라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으로 본다면 범일이 국사성황신으로 자리잡기까지는 신비주의적이거나 민간신앙에 근거했다기보다는 다분히 지역 호족의 정치적인 의도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일국사가 오랫동안 국사성황신으로 받아온 존경과 추앙마저도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 성황신으로 정립한 주체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 성황신을 향해 누대로 빌어 온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과 진실 된 기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헌자료]

1. 『조당집(祖堂集)』

명주(溟州)[지금의 강릉] 굴산에 예전에 통효대사(通曉大師) 사염관(嗣鹽官)이 있었는데 법호는 범일로 속성(俗姓)은 구림부족(鳩林府族) 김씨이다. 조부의 이름은 술원으로 관직이 명주도독에 이르렀으며 조심스럽고 공평하게 민속(民俗)을 살폈고 사람들에 따라 너그럽게도 사납게도 대하여 아직도 민요(民謠)에 전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마음에 전하였다. 그 어머니 문씨는 누대로 걸쳐 부잣집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이 부인의 모범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를 임신하였을 때 해를 어루만지는 상서로운 꿈을 꾸고 이에 810년(원화(元和) 5, 경인) 정월 상진(上辰)에 태(胎)가 있은 지[잉태한 지] 13개월 만에 탄생하셨는데 곱슬머리[부처님의 머리모양]의 특이한 자태와 정수리가 진주모양을 한 기이한 얼굴상이었다.

나이 15살에 이르러 출가하기로 맹세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양친께서 함께 서로 상의하여 말하기를 “전세(前世)로부터 인연(因緣, 宿緣)과 선과(善果)[善業에 의하여 받은 좋은 果報]가 있어 뜻을 빼앗을 수 없으니 너는 모름지기 먼저 잘 생각하여라. 우리가 헤아릴 수는 없구나.” 하셨다. 이에 헤어지며 부모님께 하직하고 산을 찾아 입도하였다. 나이 20세가 되어 서울[京師, 慶州]에 이르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청정한 수행을 하였고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더욱 힘써 승려들의 귀감이 되었고 스님들이 수도하는 방식을 만드셨도다. 827~835년 중에 혼자서 중국에 유학가기를 서원(誓願)하여 드디어 조정에 들어가서 왕자 김의종에게 마음속에 생각한 바를 털어놓자 공이 한 뜻을 소중히 여겨 사행(使行)[중국에 가는 것. 또는 사신행차]을 허락하고 그의 배를 빌려 주어 당나라에 도달할 수 있었다.…[중략]…

이에 고향에 돌아가 불법을 선양할 생각이 있어서 사양하고 846년(회창 6) 팔월에 험한 파도를 헤치고 계림(鷄林)[즉 新羅]으로 돌아왔다. 아름답도다 달빛이 현도(玄兎)[우리나라 또는 강릉을 말함]의 성에 흐르고, 빛나고 밝게 여의주가 청구(靑丘)[우리나라]의 경계를 비추었구나. 851년(대중 5) 정월에 이르러 백달산 연좌(宴坐)의 자리에서 명주도독 김공이 곧 굴산사 주지로 오시기를 청하였다. 한번 숲속에 앉은 지 40여 년에 소나무와 열을 지어 도를 행하는 집[행랑채]이 되었고 바위가 평평해져 편안히 좌선하는 자리가 되었다. ‘어찌 이것이 조사(祖師)의 의지(意旨)냐’고 물어 보면 대답하기를 “백육대(百六代)[불법의 스승들]를 일찍이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하고, 또 묻기를 ‘어찌 이것을 받아들여 중들이 힘쓸 바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부처의 수련을 답습하지 않고 일체 꺼리는 바를 끊었으며 다른 깨달음을 따랐다”고 하였다.

871년(함통(咸通) 12) 3월에 경문대왕(景文大王)이 880년(광명(廣明) 1)에 헌강대왕(憲康大王)이 887년(광계(光啓) 3)에 정강대왕(定康大王) 등 세 왕이 아울러 모두 특별히 어찰(御札)을 보내오셔서 흠모하고 우러러 보기를 국사(國師)에 봉한 사람에 비길 수 있었다. 각각 중사(中使)[궁중에서 은밀히 보내는 사신]로 환관 내시(宦官 內侍)를 차출하여 서울[경주, 서라벌]에 모셔 오도록 하였으나 대사가 오랫동안 굳게 수도하고 곧고 명확히 하여 가지 않으셨다. 갑자기 889년(문덕 2, 기유) 4월말에 문인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장차 다른 곳으로 가니 지금 영결(永訣)하고자 한다. 너희들은 진실로 속세 사람들의 얕은 뜻으로 난동을 피워서 슬퍼하거나 마음 상하게 하지 말라. 다만 스스로 마음을 닦아 종지를 추락시키지 말라”고 하셨다. 곧, 5월 1일이 되어 갈비뼈[가슴]를 자주 보여주시다가 굴산사 상방에서 열반하셨으니 나이 80이요, 승랍(僧臘)[스님이 되어 지낸 햇수]이 60이었다.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요, 탑호(塔號)는 연휘지탑(延徽之塔)이다.

[원문]

溟洲崛山 故通曉大師 嗣塩官 法韗梵日 鳩林府族 金氏 祖諱述元 官至溟洲都督 薰平察俗 寬猛臨人 淸風尙在於傳也 其母文氏 累代豪門 世稱婦範 及其懷妊之際 夢微日之祥 爰以元和五年庚寅正月上辰 在胎上十三月而誕生 螺髟殊姿 頂珠異相

年至一五 誓願出家 告于父母 二親共相謂 曰宿緣善果 不可奪志 汝須先度也 於是落采辣親尋山入道 年至二十 到於京師 受具促 貳淨行精勤 更勵爲緇流之龜鏡 作法之揩模伯乎 大和年中 私發佳遊中華 遂投入朝王子金公義棕 校露公以重善志 許以司行 假其舟達子唐國 ....

於是思歸 故里弘宣佛法 却以會昌六年丁卯八月 還泏段于鷄林 亭亭月光玄之城 意株照徹靑丘之境 大中五年正月 白達山宴坐 溟洲都督金公 仍請佳崛山寺 一坐林中四十餘載 列松爲行道之廊 平石作安之座 有問如何是祖師意 百六代不失 又問如何是納僧務 曰莫畓佛揩級切忌隨他悟

咸通十二年三月景文大王 廣明元年憲康大王 光啓三年定康大王 三王並皆特迂御礼 遙中使仰赴原封國師 各中師迎赴師大師 又堅貞礭平不赴矣 忽於文德二年己酉四月末 召門人吾將他往令須永訣 汝等莫以世精淺意亂動悲傷 但自修心不墮宗旨也 卽以五月一日 方肋累示 滅干崛山寺上房 春秋八十 僧年六十 謚號通曉大師 塔名延微之塔)

2. 『고려사(高麗史)』

태조신검(神劍)을 토벌할 때 순식(順式)이 명주로부터 그 군사를 거느리고 회전(會戰)하여 이를 격파하니 태조순식에게 말하기를 “짐(朕)이 꿈에 이상한 중이 갑사(甲士) 3천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이튿날 경(卿)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우니 이는 그 몽조(夢兆)로다.” 하니 순식이 말하기를 “신(臣)이 명주를 떠나 대현(大峴)[대관령]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승사(僧祠)가 있었으므로 제(祭)를 마련하고 기도하였는데 주상의 꿈꾼 바는 반드시 이것일 것입니다.” 하는지라 태조가 이상하게 여겼다.

[원문]

太祖討神劍 順式自溟州 率其兵會戰破之 太祖謂順式曰 朕夢見異僧 領甲士三千而至 翼日卿率兵來助 是其應也 順式曰 臣發溟州至大峴 有異僧祠 設祭以禱 上所夢者必此也 太祖異之

[굴산사지 유적과 유물]

1. 굴산사지[사적 제448호]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597번지 일원에 위치하는 굴산사의 절터이다. 굴산사는 신라하대에 형성된 9개의 선종산문 가운데 사굴사문(闍堀山門)의 본거지였으며, 신라 문성왕 13년(851) 범일선사(梵日禪師)[810~889]가 명주도독(溟州都督) 김공(金公)의 요청으로 이곳에 주석하여 사굴산문을 처음 열었던 곳이다.

그러나 굴산사는 창건 이후의 변천과정과 폐사시기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간행된 여러 관찬사서·사찬 읍지류에 관련 기록이 전혀 없어 대체로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굴산사지 주변 일대에는 통일신라시대 석조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범일의 승탑으로 전해오는 굴산사지 부도[보물 제85호]를 비롯해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제86호] , 석조비로자나불상[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8호], 범일의 탄생설화가 깃든 석천(石泉)과 학바위 등이 남아 있어 당시 굴산사의 옛 모습과 위상을 짐작케 한다.

굴산사의 절터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대홍수 때 밭경작지 일대에서 주춧돌과 계단 등 일부 건물지와 기와편이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처음으로 인식되었다. 그 후 40여 년 동안 굴산사지에 대한 학술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1975년 가톨릭관동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해 범일의 부도탑비로 추정되는 비석편을 비롯해 부도탑재, 석조불상, '屈山寺(굴산사)' 명문기와 등 많은 유물이 수습되어 절터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었다. 이후 1983년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농업용수 개발을 위한 매설공사에 따른 긴급 발굴조사를 실시해 건물지 기단과 축대 일부가 확인되었고, '屈山寺(굴산사)'·'五臺山(오대산)' 명문기와 등이 출토되어 굴산사의 중심절터가 재확인되었다. 1998년부터 1999년 사이 범일의 부도탑으로 전해오는 굴산사지 승탑의 해체복원과 정비를 위한 학술조사가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진행되어, 부도탑 주변에 흩어져 있거나 매몰된 부도 조각을 찾아내어 팔각원당형 부도탑으로 복원하였으며, 그 주변에서 부도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지 일부가 확인되었다.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해 굴산사지 동쪽 앞을 흐르던 어단천(於丹川)이 범람하여 절터의 중심부가 유실되면서 여러 건물지의 주춧돌과 축대, 기와편들이 다수 드러나게 되자,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긴급수습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동-서 140m, 남-북 250m 이르는 절터의 범위가 대략 파악되었고, 법당으로 추정되는 제법 큰 규모의 건물지와 승방, 회랑 등과 관련된 건물지 일부가 확인되었으며, 많은 양의 고려시대 청자와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굴산사지는 역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3년 6월 2일 ‘강릉 굴산사지’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448호로 지정되었다.

2010년 강릉시와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굴산사지 문화재 학술조사연구 및 정비복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2016년까지 굴산사지에 대한 시·발굴조사가 7차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건물지 30개소를 비롯해 담장지, 연못지, 배수로, 출입문지, 보도시설, 방아터, 계단지·부도탑지하석실 등 다양한 유구들이 새롭게 확인되었으며, 동종(銅鐘)편·쇠와 흙으로 구워 만든 철마·(鐵馬)와 토마(土馬)·부도탑재·탑비의 귀부·탑비석편·소조불상 등의 유물을 비롯해 '天慶三年(천경삼년)'·'五臺山金剛社(오대산금강사)'·'屈山寺(굴산사)'·'崛山寺(굴산사)'·'五臺山(오대산)'·'天啓五年(천계5년)' 명문 평기와류와 사래기와·치미·이형기와 등의 특수기와, 고려시대 청자 및 백자, 중국도자, 분청사기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수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굴산사지는 비록 창건기 가람구조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사굴산문의 본산(本山)으로서 그 역사성에 걸맞게 승려의 수행과 생활, 선승에 대한 추모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성격이 각기 다른 복수의 단위공간이 어우러진 대규모의 사찰 가람으로 조성·운영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고려시대 12세기를 전후에 증·개축을 통해 여러 차례 변화과정을 겪으면서 여말선초까지 명맥을 유지하다 폐사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승탑하부의 매장시설은 길이 3.4m, 너비 1.75m 규모의 초대형 석실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굴산사 폐사 이후 절터 일부 지역은 조선 인조 3년(1625) 강릉부사와 지역유림들이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석천묘(石川廟)[송담서원의 전신]를 건립하여 일시적으로 운영된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2.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제86호]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1181번지, 굴산사 초입에 해당하는 남쪽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높이 5.4m의 이 거대한 당간지주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며 아무런 장식 없이 간결하게 다듬어 놓은 것이 특색이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깃대(幢竿)를 고정하기 위하여 사찰의 입구나 뜰에 세우는 두 개의 기둥이다. 깃대에는 사찰의 행사 및 의식이 있을 때나 부처나 보살의 공덕을 기릴 때 깃발을 매단다. 이 당간지주는 깃대는 없어지고 지주만 남아 있다.

대개의 당간지주는 아무리 장식성이 없다고 해도 바깥쪽 모서리의 모를 죽인다거나 곽선을 두른다거나 지주꼭대기가 유려한 사분원을 그리는 게 흔한 일인데, 이 당간지주는 지주 네 면에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아랫부분에는 돌을 다듬을 때 생긴 잡다한 정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거의 꼭대기까지 직선을 이루다가 차츰 둥글게 깎아 곡선이 되도록 하였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공(杆孔)을 아래위로 두 군데 마련하였는데 위쪽은 상단가까이에, 아래쪽은 밑둥치 4분의 1되는 부분에 둥근 구멍을 관통시켜 당간을 고정시킬 수 있게 하였다.

지주의 규모가 엄청나 이 당간지주에 세워졌을 당간의 높이가 얼른 상상이 되질 않을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당간이 지주의 서너 배가 된다고 생각해보면 상당한 높이였을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긴 당간위에서 깃발이 펄럭거렸다면 아마도 10리 밖에서까지 절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당간지주의 위대함이 규모에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규모에 맞도록 간결하고 강인한 기법을 보이고 있어 누구라도 통일신라시대의 웅대하고 힘찬 기력을 느낄 수 있다.

3. 굴산사지 부도[보물 제85호]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731번지, 굴산사터 북쪽의 마을 뒷동산에 범일국사의 부도라고 전해지는 높이 3.7m의 부도가 있다. 재질은 화강석이다. 부도(浮屠)는 승려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모신 일종의 탑처럼 생긴 구조물이다.

범일은 889년에 입적하였으므로 전하는 대로라면 이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으나, 1999년 복원된 부도 자체의 구조와 조각수법으로 보아서는 통일신라시대와 그보다 늦은 고려시대 초기의 부도재들이 혼용되어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도는 일제강점기에 도굴당하여 무너진 것을 그 후에 복원하였으나 원형대로 복원되지 않은 것 같다는 지적이 있어, 1998년도에 학술조사를 통해 1999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해체 복원 당시에는 부도탑의 어느 부분에서도 사리함을 안치한 구조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지대석 밑에 매장시설인 초대형 석실구조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화강암으로 건조된 이 부도는 팔각원당의 일반형 석조부도로 신라 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여러 군데에 새로운 수법이 가미되었다. 높고 널찍한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형성하고 탑신부를 안치하였으며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였다.

지대석은 큼직한데 상면까지 8각이다. 8각의 측면에는 1좌씩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아래에서 위로 퍼지는 구름무늬가 아로새겨진 하대석은 팔각의 고임돌 위에 얹은 원형이다. 위쪽 평면에 수구(水溝) 같은 홈이 파여져 중대석을 받들고 있다.

팔각의 중대석은 모서리마다 세운 기둥에 구름무늬를 3단으로 새기고 그사이에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과 공양상(供養像)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앙련을 돋을새김하였으며 연꽃잎 안에는 다시 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몸돌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팔각으로 다듬었으며, 팔각지붕들은 지붕면의 경사가 급하며 육중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귀꽃[탑 지붕돌의 추녀마루 끝에 꽃무늬를 새긴 장식]이 표현된 보개(寶蓋)[탑 상륜의 보륜과 수연 사이의 지붕 모양의 장식]와 연꽃무늬를 돌린 보주(寶珠)[탑의 상륜부에 놓인 둥근 모양의 구슬]가 남아 있다. 비록 몸돌이 지나치게 낮고 작은데 비해 지붕돌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균형감이 다소 떨어지지만 조각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부도이다.

4. 굴산사지 석불[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8호]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603-1번지, 당간지주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민가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 불상은 석조비로자나불상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얼굴의 마모가 심하고 팔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며, 특히 하반신은 많이 파손되어 있어 전체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손 역시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두 손을 가슴까지 올려 왼손을 약간 아래로, 오른손은 약간 위로하고 있는 모양으로 미루어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이다. 머리에는 마치 소라 같은 머리카락이 굵직굵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어깨는 당당한 모습이고, 그 밑으로는 신체의 굴곡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머리위에는 나중에 올려진 것으로 보이는 팔각지붕돌을 쓴 독특한 형태이다.

이외에도 당간지주에서 서쪽 약 100m 떨어진 작은 암자[현재 굴산사]에 가면 지권인(智拳印)을 한 석조비로자나불상 2구가 있다. 형체는 완전하지만 마멸이 심해 얼굴 표정을 알 수 없고 목은 대체로 짧고 상대적으로 넓은 두 어깨는 둥글다. 어깨에서 무릎으로 흘러내리는 두꺼운 법의는 팔을 비롯한 신체의 각 부분을 둔중하게 덮고 있다. 전체적으로 불균형한 비례를 보이고 있으며 추상화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또한 범일국사의 탄생설화가 얽힌 우물인 석천에도 불두가 없는 작은 석조비로자나불상이 있었으나 2002년 태풍 때 유실되었다. 현재 굴산사터에 남아 있는 석불들은 모두 고려시대의 작품들로 짐작된다.

[의의와 평가]

강릉 굴산사지는 오늘날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으로 모셔지고 있는 범일선사가 개산한 신라하대 사굴산문의 본산이자 근본도량으로서 그 역사적 위상과 가치는 매우 높다. 현재까지 창건기 가람 양상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규모의 사찰 가람을 조성하여 운영되었다는 점,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오대산 남대 지장암의 신앙결사체인 '금강사'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 범일의 승탑으로 전해지는 굴산사지 부도 외에 또 다른 2기의 부도탑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 제물의 성격을 띠는 말 모양의 형상을 통해 민속신앙과 관련된 제의행위가 있었다는 점, 폐사된 이후 율곡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 건립되어 운영되었다는 점 등 여러 정황들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앞으로 우리나라 선종9산의 가람배치 구조와 변천 양상뿐만 아니라 사굴산문의 불교사적 위치와 불교문화의 전개 양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2.15 2011 한자 최종 검토 회창(會昌)4년(844), 930년(경순왕4)에,석상경제(石霜慶諸) ->회창(會昌) 4년(844), 930년(경순왕 4)에, <인명>석상경제(石霜慶諸)</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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