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50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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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永邦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규대 |
[정의]
일제 강점기 강릉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강릉 지방의 3·1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초순 강릉 읍내에서 시작되어 외곽 면 소재지로 확산되면서 5월까지 지속되었다. 강릉 3·1 독립 만세 운동은 강릉 보통학교 이명의(李明儀)를 중심으로 하는 학생 비밀 결사 조직, 강릉 청년회 최선재(崔善在)·조대현(曺大鉉)·최선근(崔善根)·최돈옥(崔燉玉)·김진숙(金振淑)·최돈제(崔燉濟)·최선호(崔善浩)·정식화(鄭軾和) 등 청년 비밀 결사 조직, 초당리 영어 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창동회(昌働會) 구성원인 최이집(崔頤集)·최진규(崔晉圭)·박장실(朴章實)·최영방(崔永邦)·김봉공(金鳳公)·유옥일(柳玉一) 등 청년 비밀 결사 조직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상호 연계하여 주도적 구실을 수행하였다.
강릉 3·1 독립 만세 운동 참가자는 연인원 1만여 명으로 집계된다. 그중 80여 명이 부상하였고,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140여 명이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주로 함흥 지방 법원 강릉 지청에 이송되어 일본 경찰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을 받은 뒤 복역하였다. 그간 확인된 복역자와 형량을 보면 최선재와 조대현은 각각 징역 10월, 최선근 징역 6월, 최돈옥과 김진숙은 각각 징역 4월, 이명의 태형 90, 최진규와 최이집은 각각 징역 4월, 박장실·최영방·김봉공 등은 각각 태형 90, 유옥일은 기소 유예, 정식화는 태형 90 등의 옥고를 치렀다.
강릉 지역에서 일어난 3·1 독립 만세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가장 빛나는 민족 해방 운동이었다. 이와 같은 항일 투쟁 정신은 암울했던 당시 민족 독립의 의지와 열망을 확인하는 횃불이 되었다. 당시 강릉 지방 시민들의 주체적 역량과 민주 시민 사회의 발전을 담보하는 기념비적인 의미를 3·1 독립 만세 운동에 부여할 수 있다.
[활동 사항]
최영방은 1883년(고종 20) 강원도 강릉시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4월 4일 최영방은 최이집·최진규 등과 함께 강릉군 강릉면 남대천 축방 보수 공사에 참여하였던 농군들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 만세 시위에는 초당동·송정동·포남동·옥천동 등 4개 동에서 200여 명의 농민이 참여하였는데, 이는 4월 2일 강릉 장날 만세 시위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다. 일본 경찰과 군대의 탄압으로 만세 시위는 해산되었고, 주동 인물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최영방도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받았다. 1951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