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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866
한자 東城王
영어음역 Dongseongwang
영어의미역 King Dongseong
이칭/별칭 말다,모대,마제,여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서정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출신지 일본 큐슈[九州]
성별
몰년 501년연표보기

[정의]

삼국시대 백제 제24대 왕.

[가계]

백제 제22대 왕이었던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동성왕을 가리켜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곤지의 5명의 아들 중 둘째’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활동사항]

동성왕(東城王)[재위 479~501]은 모대(牟大)·말다(末多)·마제(麻帝)·여대(餘大) 등의 별칭을 갖고 있었고,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고 전해진다. 제23대 삼근왕이 15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동성왕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으며, 당시 나이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5세 이하의 유년(幼年)이었다. 그런데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백제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진로(眞老) 등에 의해 옹립되었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후 그의 생애는 웅진시대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키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는데 진력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집권 초기에는 자신을 왕위로 옹립한 진로(眞老)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임명하는 등 한성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구 귀족 세력들을 등용하여 정치적인 안정을 꾀하였지만, 곧바로 이러한 구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금강 유역권의 신진 세력들을 중앙 귀족으로 등용시켰다.

이때 등장한 신진 귀족 세력으로는 사씨(沙氏)·연씨(燕氏)·백씨(苩氏) 등을 들 수 있다. 486년(동성왕 8)에 위사좌평(衛士佐平)으로 백가(苩加)를 임명한 것과 병관좌평 진로(眞老)가 죽자 연돌(燕突)을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이 구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다. 이로써 동성왕 후기에는 이러한 신진 귀족들이 해씨(解氏)·진씨(眞氏) 등 구 귀족 세력들을 대신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강화하였는데 493년(동성왕 15) 신라의 이찬(伊湌) 비지(比智)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양국의 동맹관계를 좀 더 굳건히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실제로 그 다음 해인 494년에 신라가 고구려와 살수원(薩水原)에서 싸우다 불리하여 견아성(犬牙城)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동성왕은 3천 명의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었다. 신라 또한 그 다음 해인 495년에 백제가 치양성(雉壤城)에서 고구려와 싸우다 구원을 요청하자 곧바로 장군 덕지(德智)를 보내 구원하는 등 양국은 고구려에 대해 공동 전선을 형성하였다.

동성왕은 국제 관계에도 관심을 기울여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의 혼란기 속에 교류가 뜸했던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재개하였다. 484년(동성왕 6) 남제(南齊)가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의 작호를 내리자 이에 질세라 곧바로 교류를 시작하였으며, 486년에도 사신을 보냄으로써 중국과의 교류가 재개되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치적을 바탕으로 동성왕은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다. 먼저 486년(동성왕 8) 궁실을 수리하여 왕실의 면모를 일신하였고, 뒤이어 우두성(牛頭城)·사현성(沙峴城)·이산성(耳山城) 등을 축조함으로써 수도에 대한 방비 체제를 완비하였다. 또한 백제와 신라 사이의 요충지였던 탄현(炭峴)에는 목책을 설치하여 변방을 강화하였다.

동성왕이 등극하면서 취해진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통해 백제는 정치적인 안정을 거둘 수 있었고, 지방에 대한 지배력도 더욱 강화되었다. 498년(동성왕 20)에는 탐라(耽羅)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친히 무진주(武珍州)까지 출동한 일이 있는데, 동성왕이 오늘날의 전라남도 광주에까지 출동한 것을 보면 적어도 이 시기에는 충청도 지역과 전라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내외적 상황은 그다지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489년(동성왕 11)에는 큰 풍년이 들기도 했지만 491년(동성왕 13)에는 큰 홍수로 왕도 웅진의 민가 200여 채가 떠내려가는 일이 있었고, 마침내 그 해에는 백성들이 굶주리다 신라로 도망하는 자가 600여 집이나 되었다.

497년(동성왕 19)에도 홍수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 2년 뒤인 499년(동성왕 21)에는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마침내 고구려로 도망해 가는 사람이 2천 명이나 되었다. 보다 못한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구제할 것을 청하였으나 동성왕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왕궁 동쪽에 5장(丈) 높이의 임류각(臨流閣)을 지어놓고 측근들과 더불어 밤새워 환락을 즐기는가 하면 신하들이 상소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궁궐 문을 닫아버리기까지 하였다. 왕권 강화의 단계를 넘어서서 전제 군주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동성왕의 전제 군주적인 모습은 구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시킨 신진 귀족세력들의 힘이 커지자 이들을 견제하는 조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위사좌평 백가(苩加)를 강제로 가림성주(加林城主)로 내보낸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백가는 구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동성왕이 등용한 신진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지만, 말년에는 오히려 백가를 견제하기 위해 가림성주로 내보내려 한 것이다. 백가는 병을 핑계로 대면서까지 가지 않으려 했지만 왕이 허락하지 않자 도리 없이 가림성주가 되었다. 그러나 백가는 이 일로 왕을 원망하게 되었고, 동성왕이 그 근처에 사냥 나왔을 때 마침내 자객을 시켜 왕을 시해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동성왕은 불안했던 웅진시대 초기의 정국을 안정시키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는 등 상당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 과정에서 백성들과 귀족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동성왕의 죽음에 대해서 『일본서기』에는 포학하고 무도(無道)하여 국인(國人)들이 제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전제 정치화되어가는 가는 왕권 강화책에 귀족들의 반발이 상당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왕의 정책은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라는 전대미문의 혼란기에 왕권을 안정시키고 무령왕시대와 성왕시대에 백제가 재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놓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묘소]

동성왕의 무덤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따라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무령왕릉의 발견 이후 무령왕릉과 인접해 있는 송산리 6호분을 동성왕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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