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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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鷄龍面同族村 |
영어의미역 | Gyeryong-Myeon Single-Clan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에 있는 집성촌.
[개설]
현재 계룡면에 유허가 남아 있는 전통 있는 성씨들은 대체로 16세기 이후 터를 잡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그 이전에는 간혹 전설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계룡면의 대표적인 성씨로는 진주정씨, 전주이씨, 강릉유씨, 해주오씨, 순천박씨, 부안임씨, 창녕성씨, 장기정씨 등이 있다.
[형성 및 변천]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에는 수백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삶을 일구며 살아왔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 어떤 이유로 이곳에 처음 입향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밝혀진 것이 없다.
유허가 남아 있는 주요 성씨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입향한 성씨는 1460년경 입향한 것으로 추정되는 양화리 진주정씨이다. 양화리 진주정씨의 입향조는 정세규(鄭世規)로, 애일당 정분의 손자이며 정지산의 아들로서, 사화에 연루되어 경기도 안성에서 이거하였다. 정분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관직을 삭탈당하였고, 정지산은 부친이 사사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공주 지역에 은거하게 된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정세규가 양화리에 터를 잡게 되었다.
또한 양화리에는 순천박씨가 기반을 잡고 있다. 순천박씨는 1500년 초 정세규의 사위인 박인손이 들어오면서 양화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박인손은 원래 전라도 영암에서 세거하다 잠시 경천역에 머물렀다. 이때 정세규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되었다고 한다.
1500년경에는 금대리의 장기정씨들과 봉명리·구왕리의 강릉유씨, 월곡리의 전주이씨가 들어와 터를 잡고 생활하게 되었다. 금대리는 장기정씨의 집성촌으로 『장기정씨세보』에는 ‘상(相)’ 항렬의 13대조 정승주(鄭承周)가 최초로 공주에 입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승주가 공주 경천에 터를 잡은 이후 대대로 여기서 살아왔으며, 후손들의 묘가 금대리 일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 16세기 중반 이후로 금대리가 장기정씨의 집성촌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봉명리와 구왕리의 강릉유씨들은 봉명리에 유현남(劉賢男)이 이거하면서부터 자리를 잡았다. 유현남은 1545년(인종 1) 인종이 1년간 재위한 후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벼슬자리를 버리고 현재의 충청북도 진천에서 봉명리로 이거하여 은거하였다고 한다. 유현남의 아내는 무안박씨로, 당시 무안박씨는 노성, 상월, 학당리 세거 성씨로, 처가의 인연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구왕리는 봉명리와 방고개를 사이에 두고 있어 옛길을 따라 왕래하던 곳이다. 이런 지리적 요건으로 유자후(劉自厚)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에는 유자후가 터를 잡으며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있다. 월곡리의 전주이씨는 이번(李蕃)이 월곡에 입향하여 마을 입구에 정자를 세우고 엄정(掩亭)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엄정기』에 의하면 이번은 공명문달(功名聞達)을 원하지 않아 월곡에 은거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1600년경에도 여러 성씨들이 이거해 오는데, 그중 화은리와 기산리의 해주오씨와 내흥리의 창녕성씨가 있다. 해주오씨가 계룡면 일대에 세거하게 된 것은 약 400년 전 오준(吳濬)이 화은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오준은 원래 우성면 상서리에 살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직후 외가인 여사울 인근으로 분가하였고, 이후 자손들이 화은리와 기산리 등지로 퍼져나간 듯하다. 기산리에는 오수혁의 효자 정려가 있다.
내흥리의 창녕성씨의 입향조는 창산군 성대훈(成大勳)의 손자인 성이헌(成爾憲)이다. 성이헌은 17세기 후반 공주판관으로 부임하여 장모인 박남박씨를 봉양하던 중 사망하자 내흥리 상난당(위난뎅이)에 모셨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내흥리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이헌이 사망한 후에는 계룡면 내흥리 내동에 안장을 하였고, 이후 창령성씨의 세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1700년경의 대표 이거 성씨는 향지리의 부안임씨와 화헌리의 장기정씨이다. 부안임씨의 입향조는 임희욱(林希郁)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임명동의 효행비와 안동김씨의 정려비가 세워져 있다. 화헌리에는 화산(華山) 정규한(鄭奎漢)을 제향한 화산영당이 있는데, 이는 그의 학문 세계를 흠모한 여러 고을의 사림들이 청원하고 관찰사가 상언하여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현황]
계룡면에서는 1950년대를 전후하여 현대화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동족마을이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