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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198
한자 牛城面同族村
영어의미역 Useong-Myeon Single-Clan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춘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마을|집성촌
면적 79.43㎢
총인구(남, 여) 6,716명(남 3,418, 여 3,298명]
가구수 2,726가구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에 있는 집성촌.

[개설]

1920년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우성면반촌리·동곡리·목동리·귀산리·내산리에서는 만경노씨, 상서리·방문리에서는 함평오씨, 방흥리·신웅리에서는 보성오씨, 옥성리·대성리·봉현리에서는 김해김씨, 보흥리·옥성리에서는 단양이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형성 및 변천]

1. 만경노씨

『만경노씨족보』에 의하면 만경노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명종만경군(萬頃君)에 봉해진 노극청(盧克淸)[?~?]으로 본래는 전라도 만경에 세거하고 있었는데, 노극청의 7세손인 노혁(盧革)[?~?] 때에 이르러 공주 지역에 정착하였다. 노혁은 판군기감(判軍器監) 이안의(李安義)의 딸 공주이씨와 혼인하였는데, 공주이씨가 지역 대표 토성인 점으로 미루어 노혁이 처가와의 인연으로 공주에 입향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초기에 공주 지역에 정착한 만경노씨는 조선시대 후기에 삼의사(三義士)를 배출하는 등 지역의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노혁 후손이 지금의 공주시 우성면 동곡리 일대에 터를 잡아 세거하면서 반촌리·귀산리·동곡리에는 만경노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그 일대에 약 142호가 만경노씨 집안사람이다. 반촌리동곡리의 경우에는 불과 몇 집만 빼고 모두가 만경노씨인데 비하여, 귀산리에는 만경노씨들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

2. 함평오씨

상서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성씨는 함평오씨인데, 약 500년을 거주하여 오고 있다. 원래 함평오씨는 공주 웅진동에서 고려시대 이후 터를 잡고 살았으나, 조선시대부터 상서리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3. 대구서씨

어천리는 대구서씨의 집성촌이다. 어천리 버든여울은 현재 20가구 가운데 18가구가 대구서씨이다. 대구서씨가 버든여울에서 자리 잡은 때는 200년 전 수직(壽職)으로 돈녕부도정 벼슬을 받은 서맹수(徐孟修)[1728~1802]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부터이다.

원래 우성면의 대구서씨는 처음 서응리(徐應履)[1600~1666]가 우성면 봉현리로 들어왔다가 아들 서문영(徐文英)[1626~1699]이 죽당이로 이거하였다. 서응리의 증손이 서맹수인데, 그가 버든여울로 옮겨와 터를 잡은 뒤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게 되면서 집성촌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4. 동복오씨

단지리는 동복오씨의 집성촌이다. 동복오씨의 단지리 입향조는 오굉의 손자인 오시수(吳始壽)[1632~1681]이다. 오시수 때의 동복오씨는 전성기라 할 만큼 번창하였다. 오시수숙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오시수의 큰아버지인 오정일(吳挺一)[1610~1670]과 해주정씨의 남편인 오정창은 각각 한성부판윤과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오시수의 동생 오시대(吳始大)는 관찰사, 오시형(吳始亨)은 전주판관, 오시적(吳始績)은 광주판관을 지내는 등 경직(京職)뿐 아니라 외직(外職)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즉 오시수의 대에 공주 지역에 전장(田莊)을 마련하고, 단지리 월굴에 오정창의 묘를 쓰면서 그의 후손들이 공주 단지리 월굴에 세거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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