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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201
한자 利仁面同族村
영어의미역 Yiin-Myeon Single-Clan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마을|집성촌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에 있는 집성촌.

[형성 및 변천]

전주이씨는 인물조뿐 아니라 문무관 등 다른 어느 가문보다 돋보인다. 이인 지역에도 전주이씨 등 여러 성씨가 세가하고 있지만 기록이나 내역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확인하기 힘들다. 우선 입향 시기로 보면 만수리, 오룡리, 신흥리의 선산김씨, 초봉리신영리의 안동김씨, 이곡리 경주이씨들이 1600년대 이인 지역으로 입향하였다.

이인면은 한양과 호남을 통화하는 대로상에 위치한 지역으로, 백제시대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입향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인 지역에서 주목해야 할 성씨는 오룡리의 전주이씨와 만수리의 연안이씨이다. 이들은 조선시대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만수리로 처음 들어온 성씨는 만수리에서의 가장 많은 성씨 분포도를 갖고 있는 선산김씨이다. 그 밖의 성씨로, 평산신씨 5가구, 한산이씨 2가구가 있다. 선산김씨 입향조인 김선언(金善彦)은 1600년대 만수리로 입향하였다.

이곡리의 경우 거주민이 가장 많았을 때는 1950~1960년대로 6·25전쟁 이후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당시 65세대 정도가 거주하였다. 주민들이 이곡리(梨谷里)의 마을 이름 ‘이(梨)’자가 배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경주이씨가 사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본래는 ‘이(李)’자였다고 말할 정도로 이곡리에는 경주이씨들이 많았다.

현재 이곡리에 거주하고 있는 성씨 중 마을 전체의 60% 정도가 경주이씨(상서공파)로, 이곡리에서 처음 자리를 잡은 성씨도 경주이씨이다. 이곡리로 입향한 경주이씨 이사형(李斯亨)은 성균관진사를 지냈으며, 이곡리로 입향한 사연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병자호란 이후 피난을 목적으로 입향하였다고 전해진다. 이곡리 주변에는 경주이씨 재실이 이곡리 선바위골, 서당골, 주대가 탄천면에 있었다.

특히 주대에 있던 재실은 1970~1980년에 세워진 것으로, 재실 앞의 전답을 통해 얻어지는 온산물로 시제를 지내왔다. 또한 재실은 이곡리의 서당 터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여러 재실들은 건물이 매우 낡아서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현재 이곡리 주대와 탄천면에 있는 재실만을 사용하고 있다.

그 밖에 1700년대에 입향한 성씨로는 반송리 전주유씨가 있는데 약 200여 년 전부터 반송리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입향조는 확인되지 않는다. 집 안에는 집안의 내력을 보여주는 많은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다. 이들 자료들은 모두 반송리와 관련이 있는 자료는 아니지만 집안의 내력과 마을의 역사를 생생히 보여준다. 고문서는 유조생부터 유선까지 300년 동안 전주유씨 집안에 관련된 자료들로, 전주유씨가 이인 일대에 정착한 이후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황]

이인 지역에도 전주이씨들이 세거하여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여러 계파로 나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이외에도 많은 성씨들이 살고 있지만 내력을 알 수 있는 기록이나 후손이 없어 정확한 사정을 정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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